제목 | 11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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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7-10 | 조회수1,511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라 불리는 베네딕토 성인은 480년 무렵 이탈리아의 중부 지방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학업을 마친 그는 수도 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동굴에서 3년 동안 고행과 기도의 은수 생활을 하였다. 그의 성덕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자 베네딕토는 마침내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서방에서 처음으로 수도회 규칙서에 공동생활의 규정을 제정하였다. 이 규칙서는 수도 생활의 표준 규범서로 삼을 정도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베네딕토 아빠스는 547년 무렵 몬테카시노에서 선종하였다고 전해진다.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은 그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제1독서 12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15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 버리리라. -. 너희 자신을 씻어라. 내 눈앞에서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복음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주해 예수의 사명 10,34-36의 병행문이 루카 12,51-53에 있으니 어록에서 따온 말씀이다. 34-36절을 묶어서 풀이하면 이렇다. 예수님의 별난 처신 때문에 그분의 가정은 분열되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르다 보니 그들의 가정들도 분열되었다. 그러니 예수님은 결과적으로 “평화가 아니라 칼을”주러 오신 셈이다. 예수님은 이런 분열 현상을 종말 전조로 이해하셨을 것이다. 21절에서는 가정붕괴 현상이 더욱 심해서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비도 자식을 그렇게 할 것입니다. 또한 자식들은 부모를 반대하여 들고일어나 부모를 죽일 것입니다”라고 한다. 21절은 분명히 박해 상황을 전재한다. 34절과 35-36절을 서로 다른 말씀으로 보고, 아울러 두 말씀 모두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고 초기교회가 지어낸 말들이라는 설도 있다. 추종과 포기 10, 37-39는 세 가지 단절어 집성문인데, 그 병행문이 루카 14,26-27; 17.33에도 있는 것으로 미루어 어록에서 따왔다. 그리고 38-39절의 변형태가 마르코에도 있다. 37절 가까운 가족이 예수 추종 또는 예수 신앙을 방해할 경우에는 효도보다 추종과 신앙을 앞세우라는 말씀이다. 38절 38절의 병행문이 루카 14.27에도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어록에서 따온 것이다. 변형태가 마르 8.34(=마태 16.24=루카 9.23)에 있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어느 누가 내 뒤를 쫓아오려거든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곧 추종에 역행하는 자아를 부정하라는 말씀이다. 위의 말슴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에는 십자가 추종으로 바뀌었다(38절=루카 14.27). 정말 예수님을 따르려면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39절 십자가 추종으로 이승의 목숨을 잃는 이는 영생을 믿고, 십자가 추종을 저버려 이승의 목숨을 지키는 이는 영생을 잃는다는 말씀이다. 추종과 보상 이 단락은 세 가지 단절어 집성문이다. 집성문의 뜻을 간추리면 이렇다. 비록 제자들은 “작은 이들”이지만 실은 예수님의 대리자요 하느님의 대리자들이다. 그러므로 찬물 한 잔이라도 대덥하면 반드시 보수를 받을 것이다. 40절 40절은 병행문이 루카 10.16에 있는 점으로 미루어 어록에서 따왔을 것이다. 루카 10.16이 어록의 말씀을 더 충실히 수용한 것 같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이는 나의 (말)을 듣는 것이요, 여러분을 물리치는 이는 나를 물리치는 것입니다. 나를 물리치는 이는 나를 파견하신 분을 물리치는 것입니다.”놀랍게도 요한 13.20에도 같은 내용의 변체가 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심부름꾼은 심부름시킨 이와 같다”는 심부름 규범이 있었는데, 40절에서는 이 규범을 전도하는 제자들에게 적용했다. 겉보기에 떠돌이 제자들은 초라히기 짝이 없지만, 실은 예수님의 대리자요, 나아가 하느님의 대리자이니 그 품위가 지극하다는 말씀이다. 41절 41절은 마태오 고유 요소다. 마태오가 소속한 시리아 지방에는 이 교회 저 교회로 돌아다니던 떠돌이 예언자들이 있었다. 이들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영접하면 예언자가 받을 보수를 받는다는 것이다. 의인들은 교회 안에서 일정한 직분을 갖거나 집단을 형성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율법해석에 따라 삶으로써 의로움을 이룩한 성실한 교우들이다. 구약의 예를 들자면 의로운 아벨 같은 사람이겠다. 42절 42절의 변형태가 마르 9.41에 있는데 많이 변절된 것인 데 비해, 마태 10.42는 비교적 순수하게 전승을 수록했다. 여기에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는 독특한 관용구가 있는데, 작은 이들은 분명히 제자들이다. 공관복음 다른 곳에도 같은 관용구가 가끔 나온다. 이 단락들의 작은 이들도 본래는 제자들을 가리켰다고 보아 무방하다. 42절의 뜻은 자명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 별볼일없는 작은 이들이다. 하지만 그들 열두 제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집단이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을 재건하시겠다는 상징행위로 열두 제자를 선정하셨다. 그러니 열두 제자 하나하나는 귀하디귀한 존재다. 고로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에게 냉수 한 잔이라도 하찮은 선심을 베풀어도 반드시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다. 11.1절 마태오가 예수님의 다섯 차례 설교를 마무리할 때면 으레 “예수께서는 ... 마치고 나서 ... 하시게 되었다”라고 끝맺는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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