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7 연중 제16주일(농민주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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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7-16 | 조회수2,014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한국 교회는 주교회의 1995년 추계 정기 총회의 결정에 따라 해마다 7월 셋째 주일을 농민 주일로 지내고 있다. 이날 교회는 농민들의 노력과 수고를 기억하며 도시와 농촌이 한마음으로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맞갖게 살도록 이끈다. 각 교구에서는 농민 주일에 여러 가지 행사를 마련하여 농업과 농민의 소중함과 창조 질서 보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제1독서 <나리,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어 환대를 받으시고, 이듬해 그의 부인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 제2독서 <과거의 모든 시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가 이제는 성도들에게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26 그 말씀은 과거의 모든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입니다. 28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주해 저자의 자기소개 – 교회의 일꾼 바오로 바오로가 바로 그 복음의 일꾼이다. 이로써 “교회의 일꾼 바오로”란 다음 단락이 준비된 셈이다. 동시에 7-8절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이 단락은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28.29절은 각각 관계문으로 이어져 있다. 29절로 긴 문장이 끝난다. 24-25.28-29절에서 저자 자신의 전기를 집약적으로 소개한다. 24절 교회를 위한 저자의 염려가 돋보이며 동시에 그는 고난받은 자로 서 있다. 에페소에 갇혀 있는 그의 모습을 연상케한다. “고난받는 사도”라는 동기는 이미 바오로 전서에 자주 등장한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그리스도께서 아직 더 받아야 할 고난이 남아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도 자신이 겪어야 할 고난의 의미를 그리스도의 수난에 비추어 이해하려는 것이다. 곧, 사도로서 겪는 고난을 그리스도 수난으로 이끌어들여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25절 “하느님 말씀을 남김없이 전파하라”: 직역하면 “하느님 말씀을 꽉 채우도록”, 하느님 말씀을 생동감있게 표현한 말이다. 사도를 “교회의 일군”으로 뽑아 세운 목적은 “하느님 말씀”을 온전히 또 풍요롭게 선포하는 것이다. “교회의 일꾼”: 23절에서 “(복음)의 일꾼”과 직결된다. “교회의 일꾼”이 될 수 있는 자격과 그 근거는 하느님 친히 그 사명을 사도에게 맡기셨다는 데 있다. 곧, 세상과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종합 구원계획 안에서 보아야 한다. 26절 26-27절의 주제는 한마디로 “하느님 말씀의 신비”다. 지금까지 감추어져 있던 신비가 이제 계시되었다. 이전과 이제를 “그리스도 계시”를 정점으로 대조시켜 놓고 있다. 21-22절(“한때...이제”)을 연상시킨다. 27절 “이 신비가 얼마나 풍요롭고 영광스러운지를” 직역하면 “이 신비의 영광의 풍요로움을”, 신비의 충만성을 말하고자 한다. 이 신비가 지니는 영광의 풍요로움은 인간 언어로 형언할 수 없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감추어져 있던 신비는 “그리스도”자신인데, 그 신비 곧 그분이 “이제” “여러분 안에서”밝혀 계시되었다. 저자가 지금까지 인류에게 숨겨져 있던 “신비”가 무엇인지를 설명함에 있어 단순히 “그리스도” 대신 “여러분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라고 표현한 데 주목해야 한다. 하느님 말씀의 독특한 성격을 이르고자 하기 때문이다. 즉, 하느님은 저 멀리 인간과 동떨어진 공중에 홀로 서서 또는 그러한 상태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인간과 관계를 맺는 가운데 자신을 드러내는 분임을 다시 한번 깨우쳐준다. 따라서 하느님의 이같은 인간과의 관계 추구는 그분 신비의 특성이다. 28절 28-29절에서 저자는 “모든 사람을” 자신의 복음선포 활동 범위에 넣는다. 그가 이 점을 얼마나 강조하는지는 28절에서 “모든 사람을”이란 표현을 세 번씩이나 쓰는 데서 엿볼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 완전한 이로 새우기 위하여” 복음선포의 목적을 서술한 말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되게하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바오로가 받은 사명이며 이유다. 어떻게 하는 것이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3.10에서 나타나며 더욱 상세한 묘사는 3,12-27에서 다시금 전개된다. “지혜를 다해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한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복음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40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주해 마르타와 마리아 10,38-42는 특수사료에서 옮긴 상황어. 예수님을 영접하는 데는 음식 대접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그분 말씀을 듣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38절 요한 11.1에 의하면 두 자매는 예루살렘에서 요르단강 쪽으로 3키로미터쯤 떨어진 베다니아에 살았다 하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39절 예수님이 여자를 가르치신 것은 당대 유다교 관행을 거스른 것이다. 42절 예수님의 말씀 주제는 하느님의 나라. 그런데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여러분은 오히려 그분의 나라를 찾으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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