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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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7-24 | 조회수1,061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그는 베드로 사도, 요한 사도와 더불어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세 제자 가운데 하나이다. 열두 사도에는 야고보가 둘 있는데,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 ‘작은[소] 야고보’와 구분하여 ‘큰[대] 야고보’라고도 부른다. 야고보 사도는 42년 무렵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였다. 제1독서 10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13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말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5 이 모든 것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주해 사도의 고난과 희망 바오로는 무수한 고초를 겪지만 절대로 절망하지 않는다. 그 까닭인즉 하느님의 힘으로 사도직을 수행하기 때문이요. 예수의 죽음에 동참하면 또한 그분의 부활에도 동참할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10-18절). 7절 보화는 고귀한 사도직을 가리키고, 깨지기 쉬운 질그릇은 못나고 허약한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 8절 8-9절의 고난 목록보다 상세한 목록이 1고린 9-13;2고린 6,4-10; 11.23-29에 있다. 9절의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는 박해를 겪어도 하느님에게 버림받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10절 10-12.14절에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의 동참을 논한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구절들을 눈여겨보라. 하나같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의 팔자는 같다. 양자는 운명 공동체라고 한다. 필립 3,10-11: “나는 그분을, 그분 부활의 힘을, 그분 고난에의 동참을 깨닫고자 합니다. 나는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습이 됨으로써 될 수 있는 대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부활에까지 도달하고 싶습니다.” 1고린 13.4: “그분은 약하셔서 십자가에 처형되셨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십니다. 우리 역시 그분 안에서는 약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을 대할 때 하느님의 능력으로 그분과 함께 살아 있을 것입니다” 로마 6,4-5: “우리는 그 죽음 안으로 (이끄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 가운에서 일으켜졌음같이 우리 또한 새 생명 안에 거닐 수 있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그분 죽음의 모양과 합치되었다면 그 부활과도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 9.11:“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킨 영이 여러분 안에 살고 있다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킨 분은 여러분 안에 살고 있는 것이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은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13절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했다”라는 시를 빌려, 자신의 믿음과 선포를 토로한다. 그럼 바오로 사도는 무엇을 믿었고 선포했나? 일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도로서 그 묘리를 선포했다. 어떻게 그런 믿음이 싹틀 수 있었나? 바오로나 고린토 신도나 다함께 받은 “같은 영으로” 믿음도 가능하고 선포도 가능하다. 15절 문법상. 내용상 여러 번역과 풀이가 가능한 어려운 구절이다. “은총이 좀더 많은 이들 사이에 불어나서”에 있어 “많은 이들”은 고린토 신도 대중이라고 보는 설, 새로운 개종자 무리라고 보는 것이 맞서 있다. 복음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주해 야고보와 요한의 간청 20절 20,20-28은 마르 10,35-45를 거의 베낀 것이다. 출전인 마르 10.35에선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간청한다. 마태오는 그들의 어머니가 간청했다고 고처썼다. 왜? 평소 예수께서 아끼신 두 제자를 보호하려고 그렇고쳤다. 마르코와 마태오의 수난사화를 종합해 보면 두 제자의 어머니 이름은 살로메였을 것이다. 21절 “당신의 나라”는 28절을 고려할 때 “인자의 나라”다. 인자의 나라는 예수께서 종말에 재림하여 다스리실 온 세상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이 나라에서 다른 제자들을 제치고 가장 높은 자리들을 차지하여 재림하신 예수님과 함께 통치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22절 예수님의 답변은 두 가지다. 현세에서 함께 죽어야만 종말에 함께 다스릴 수 있다는 답변이요 종말에 자리를 배치하는 일은 아버지 하느님의 전권에 속한다는 답변이다. 출전인 마르 10.38에선 예수님의 질문이 더 길다. “그대들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로써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까?” 여기서 잔은 죽음의 독배를, 세례는 익사를 연상시킨다. 두 상징은 비극적인 죽음을 뜻한다. 23절 출전인 마르 10.39를 보면 예수님의 답변도 더 길다. “그대들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것이고, 내가 받는 세례로써 세례를 받을 것입니다”. 24절 24-28절은 본디 20-23절과는 상관없이 따로 전승된 상황어 또는 단절어였을 것이다. 그런데 후대의 어느 전승자는 따로따로 전해온 20-23절과 24-28절을 아주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놓았다. 25절 예수께서는 비정한 정치현실을 꿰뚫어보셨다. 정치, 특히 당시의 전제정치는 압제와 폭정을 일삼고 있었다.26절 정계의 압제와 폭정과는 정반대로, 제자단에선 지위가 올라갈수록 봉사하고 종노릇하는 삶으로 살아 마땅하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유행어다. 실상 그 변형태가 23.22; 마르 9.35; 루카 9.48에도 나온다. 실상 그 변형태가 23.11; 마르 9.35: 루카 9.48에도 나온다. 26-27절의 경우에는 “크게 되다- 봉사자가 되다”유행어와, “첫째가 된다 – 종이 되다”유행어가 짝지어 나오는 까닭에 이중유행어 또는 유행어 병행문이라 하겠다. 우리 교회가 이중유행어대로만 산다면 교회야말로 세상과는 질적으로 다른 또사회.대안사회.대적사회가 될 것이다. 예수님의 상징을 빌려 말한다면 땅의 소금, 세상의 빛이 될 것이다. 28절 봉사자와 종의 모범으로 이제 예수님을 내세운다. 28절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매우 감명깊게 풀이한 그리스도론이다. 요컨대 예수님의 일생은 남을 섬기는 삶이었고, 그분의 죽음은 온 겨레와 인류의 죄를 기꺼이 대신 속죄하는 대속죄행위였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그러하기에 그분을 일컬어 “남을 위해 사신 분”이라고 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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