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9 연중 제19주간 화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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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8-08 | 조회수751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그 두루마리를 내 입에 넣어 주시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9 그래서 내가 바라보니, 손 하나가 나에게 뻗쳐 있는데, 3,1 그분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3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꿀처럼 단 두루마리를 입에 넣어 주시며, 이스라엘 집안에게 당신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다. 복음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주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라 마태오는 산상설교,파견설교,비유설교에 이어 이제 공동체설교를 엮었다. 공동체설교에서는 교회의 참 모습을 밝힌다. 18장을 일컬어 흔히 교회규범이라고도 하는데,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지녀야 할 마음가짐, 몸가짐을 밝혀 놓았기 때문이다. 1-9절은 대체로 마르 9,33-50을 옮겨쓰면서 가감, 수정한 것이다. 나머지 가운데 10-14.15,21-29절은 어록에서 따왔고, 16-10.23-35절은 특수자료인데 유다계 그리스도교 전승에서 채록했을 것이다. 1-5절은 마르 9,33-37을 옮겨쓰면서 대폭 가감, 수정한 것이다. 1절 마르코에 의하면 제자들은 서로 시기하여 누가 제일 잘났으냐고 길에서 다투었다. 마태오는 이를 고쳐, 하늘나라에서 누가 제일 큰 사람이냐는 식의 객관적 질문으로 바꾸었다. 여기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통치가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교회나 아니면 이제 어린이들처럼 처신하면 장차 들어갈 수 있는 하느님의 세계다. 논란이 계속되고 있으나 굳이 양자택일을 할 필요는 없겠다. 2절 2절은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그를 껴안으시며”를 약간 고쳐쓴 것이다. 3절 3절은 마르 10.15 “진실히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어린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결코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를 많이 개작한 것이다. 앞의 문맥을 고려해서 3절은 풀이해 마땅하다. 제자들처럼 자기를 높이지 말고 어린이들처럼 자신을 낮추어야만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오직 일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들을 참작할 것이다. 4절 4절은 어록의 말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추어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여질 것입니다”를 문맥에 맞게끔 조금 개작했다. 4절 역시 겸손을 촉구하는 훈계다. 5절 5절은 마르 9,37을 옮겨쓰면서 37ㄱ절은 고치고 37ㄴ절은 삭제한 것이다. 마르 9.37의 본래 뜻인즉,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셈이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하느님을 영접하는 셈이라는 것이다. 5절의 뜻이즉, 소외자들을 아끼신 예수님의 처신과 명령에 따라, 불쌍한 어린이, 특히 도움이 필요한 고아 같은 어린이를 돌보는 것은 곧 예수님을 돌보는 셈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소외자들을 돌보는 사람들의 선행을 당신 자신에게 베푼 선행으로 간주하신 최후심판설교를 연상케 한다. 그러니까 5절의 내용은 겸손을 촉구하신 3-4절의 말씀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마태오는 마르 9.37 출전을 존중하여 5절을 수록했다. 10절 “이 작은 이들”은 본디 예수님을 가까이서 따르던 제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18장 문맥에선 마태오 교회의 미천한 교우들을 가리킨다. 잘난 교우들이 미천한 교우들의 그리스도 신앙을 무너뜨려서도 안되고 그들을 업신여겨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작은 자들을 염려하는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항상 보는 천사들이란 늘 하느님 가까이서 시중드는 매우 높은 천사들이다. 쿰란 수도자들은 이들을 “얼굴의 천사들”이라 불렀다. 이 천사들은 작은 이들을 위해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기도하고,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을 하느님께 고발하기도 하겠다. 네 복음서를 통틀어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와 “ 여러분의 아버지”를 구별하시지, 좀처럼 “우리 아버지”라 하시지 않는다. 예외로 6.9에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호칭이 있으나 “하늘에 계신 우리”라는 수식어는 마태오의 가필이다. 12절 잃은 양을 되찾고 기뻐하는 목자 비유는 어록에서 따왓다. 본래 의미는 요약하면 이렇다. 당시 이스라엘에선 율법상 죄인들, 윤리상 죄인들은 버림받은 무리, 저주받은 무리였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런 이들에게 각별히 온정을 쏟으셨다.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면 함께 어울려 술잔을 기울일 만큼 기뻐하셨다. 어디 예수님뿐이랴. 하느님도 흥취하셨다. 이것이 비유의 골자였다. 마태오는 조금 달리 이해했다. 못난 교우 한 사람이라도 신앙의 위기에 처해 있거든 그가 멸망하지 않고 구원받도록 모든 교우, 특히 교회 지도자들이 힘써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의지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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