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2 연중 제19주간 금요일...독서,복음(주해) | |||
---|---|---|---|---|
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8-11 | 조회수533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제1독서 <내가 너에게 베푼 영화로 네 아름다움이 완전하였다. 그런데 너는 불륜을 저질렀다.> 5 너를 애처롭게 보아서, 동정심으로 이런 일을 하나라도 해 주는 이가 없었다. 8 그때에 내가 다시 네 곁을 지나가다가 보니, 너는 사랑의 때에 이르러 있었다. 12 코에는 코걸이를, 두 귀에는 귀걸이를 달아 주었으며, 60 그러나 나는 네가 어린 시절에 너와 맺은 내 계약을 기억하고, -.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게 자기가 저지른 역겨운 것들을 알려 주라고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말씀하신다. 복음 5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7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10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주해 3절 3-9절은 마르 10,2-11을 따른 것인데, 마태오는 순서를 바꾸기도 하고, 이혼과 재혼을 해도 좋다는 예외규정을 삽입하기도 했다. 마르코의 이혼 논쟁을 이혼을 금지하신 예수님의 어록 말씀을 마르코 교회에서 이혼 논쟁 양식으로 엮은 것이다. 고자론은 마태오복음만의 고유자료다. 마태오는 자기 교회 전승에서 예수님의 고자론을 물려받아 이혼 논쟁 끝에다 이어달았다. 아내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있으면” 남편은 아내를 소박할 수 있었다. 무엇이 수치스런 일이냐에 관해 율사들은 서로 다른 견해를 표명했다(미슈나. 기르(소박장) 편 9.10에는 세 학파의 견해가 있다- 이스라엘 성지 101 참조). 4절 마르코와 마태오 교회들에선 창조주의 원초적 뜻에 따라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두 교회에서는 그 구약성서적 근거로 다음 두 구절을 내세웠다.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창세 1.27)와 “그러므로 사람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은 한 몸이 되리라(창세 2.24). 6절 혼인은 남녀의 성적 결합. 두 사람이 인간적 결합일 뿐 아니라 도무지 갈라설 수 없는 한덩어리 몸이 된다는 것이다. 윤리신학자 헤링은 이를 가리켜 혼인인격이라 했다. 7절 ”이혼장을 주고 (아내를) 버리도록“은 신명 24.1 인용문, 2차 유다독립전쟁 조금 전에 작성된 아람어 이혼장을 참고하라(이스라엘 성지 80). 9절 마태오는 마르 10.11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느냐? 이는 그를 상대로 간음하는 것입니다“를 9절에 옮겨쓰면서 ”음행도 하지 않았는데“라는 예외규정을 첨가했다. 그리하여 9절은 마르 10.11과는 다른 뜻으로 변질되었다. 곧, 이혼과 재혼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지만, 아내가 간음한 경우에만은 예외적으로 남편이 아내를 소박하고 재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태오는 어록에 있는 예수님의 소박금지 말씀을 옮겨쓰면서도 예외규정을 첨가한 바 있다. 예외규정은 마태오가 소속해 있던 시리아 교회의 소박법을 반영하는 것이다. 하늘나라를 위한 독신 예수님과 그 제자 중 일부는 독신으로 살았다. 적수들은 예수 일행을 비꼬아 고자들이라고 헐뜯었을 법하다. 함구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12절의 고자론이다. 그 뜻인즉, 처음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군중에서 환관으로 쓰려고 사람들이 일부러 고자로 만든 이들도 있는데, 이들은 모두 숙명적으로 고자 신세가 된 가련한 사람들이다. 이와는 달리 ”하늘나라 때문에 자신을 고자로 만든 고자들도 있습니다“라고 힘주어 말씀하신다. 이들은 숙명이 아니고 자유로운 결단으로 독신을 택한 놀라운 사람들이다. 독신을 택하는 실존적 결단의 동기는 ”하늘나라 때문이다“. 일편단심 오직 하느님. 이미 은밀히 작용하고 장차 환희 오실 하느님께 매료된 까닭이다. 그 하느님을 알리는 데 전적으로 헌신하려는 까닭이다. 그 하느님이 아끼시는 사람들. 각별히 아끼시는 밑바닥 사람들에게 온전히 봉사하려는 까닭이다. 그 하느님이 온전히 봉사하려는 까닭이다. 결혼하는 일이 없는 부활의 신국을 암시하는 상징적 삶을 살려는 까닭이다. 이 도리를 깨친 이만이 푸른 하늘에 흰구름 가듯 청정 비구로 살아갈 수 있으리! 마지못해 독신으로 사는 자는 몽달귀신, 손말명이 되기 십상이다. 예수님 전에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명에 따라 독신으로 지냈다. 그 동기인즉, 유다민족에게 닥칠 심판을 상징적으로 예고하려는 것이었다. 예수님 전후해서 사해 북편 쿰란에서 에쎄느 수도자들 가운데 많은 이도 독신으로 살았는데, 그 동기를 살펴보면, 불결을 초래하는 남자의 정액과 여자의 월경을 되도록 피하려는 것이었다. 사도 바오로는 독신으로서 전도했다. 또한 그는 고린토 교회의 미혼 남녀들에게 독신을 권장했다. 그 주된 동기는 종말이 목전에 다가왔다는 것이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세상은 사라져 가고 있다고 한다. 신심 깊은 경상도 할머니 한분은 인생 무상을 느낄 때면 “잠시의 것은 얼마나 짧고 영원의 것은 얼마나 긴가”라는 말씀을 입에 담곤 하시는데, 바오로가 내세운 종말론적 동기와 똑같지는 않지만 일맥 상통하는 바도 있다. 2~3세기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라와 팔레스티나의 지중해변 가이사리아에서 활약한 교부 오리게네스는 12절의 고자론을 곧이곧대로 알아듣고 스스로 거세하여 많은 수모를 겪었다. 그의 자의적 핵석은 문제가 있지만 학덕을 다 갖춘 교부 오리게네스의 진지한 자세는 높이 사 마땅하겠다. 바오로도 마태오도 독신을 성령의 은사로 보았다. 또한 바오로는 사도들과 예언자들과 교사들의 직분도 성령의 은사로 여겼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독신도 성직도 점점 제도화했다. 오늘날 천주교회의 교계 실태를 보면, 오직 독신자 가운데서만 사제와 주교를 선발하고 있으니, 독신과 두 가지 은사를 합쳤다고도 할 수 있으며, 또는 독신 은사와 성직 직분을 합쳤다고도 할 수 있겠다. 본디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독신과 성적의 합일에 관해 찬반 논쟁이 심심찮게 일고 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