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5 성모 승천 대축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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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8-14 | 조회수850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둔 여인> 2 그 여인은 아기를 배고 있었는데, 5 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주해 19ㄱ절 “계약의 궤” 묘사는 유다인들의 사고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출애 25장에 의하면 계약의 궤는 천상 궤를 본떠서 제작되었다. 그 원형이 지금 여기서 나타난다. 한편 2마카 2,4-8에 나타난 유다인들의 믿음에 의하면 예루살렘이 느부갓네살에 의해 침공당할 때에 예레미야가 느보산에 숨겨두었던 이 궤가 마지막 시기에 다시 나타나리라고 한다. 묵시록 저자는 왜 이곳에서 천상 계약의 궤 나타남을 말하는가? 구약성서 세계에서 “계약의 궤”는 백성 가운데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가시적 증거였다. 이곳에서 천상 “계약의 궤”가 나타나는 것은 이제 하느님이 승리한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안에 결정적으로 현존하심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 주제는 예언 부분인 제2부 끝에서 더 발전된다. 12.1절 하늘에 나타난 큰 표징은 하느님이 현시자에게 당신 신비를 드러내신다는 보증 역할을 한다. 이례적 사건 자체는 초월적 영역에 속하되 사람들에게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 여인”은 천상적 장식으로 단장된 이 여인은 한 아들을 낳았고. 그는 메시아로 이해된다. 5절에서 그는 시편 2.9의 메시아 예언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 대목의 모든 언급들은 뱀을 이길 여인의 후손에 대해 예언하는 창세 3.15와 직접적으로 일치한다. 또한 용은 늙은 뱀, 악마, 사탄 등으로 불린다. 이어지는 절들 특히 17절로 보아 이 여인은 시온, 즉 메시아와 신도들을 낳는 하느님의 백성임을 알 수 있다. 메시아의 어머니라는 점에서 이 여인은 또한 마리아를 표현한다고도 볼 수 있다. 사실 많은 교부들과 전례서가 이 여인을 마라아와 동일시 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주석가들은 이러한 해석에 대해 주저하며, 단지 2차적인 해석으로 생각한다. 일부 주석가들은 저자가 교회의 모상으로서 마리아를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유다계 문헌에서 찬란하고 장엄한 위엄을 표현하기 이해서 자주 사용하는 상징어이다. “열두 별”은 유다 전승에서 뎔두 별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나타낸다. 요셉의 꿈을 이야기하는 창세 37.9-11에서는 부족 시조들을 별과 동일시한다. 그리스도교 문헌에서 이 상징은 교회를 건설하는 열두 사도에게 적용된다. 3절 하느님의 적장으로 나타나는 신화 속의 동물인 용은 구약성서에서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라합, 레비아단, 베헤못 등. 뿔이 열 개라는 것은 다니 7.7의 넷째 짐승과 같고, 머리가 일곱이라는 것은 어린양의 일곱 뿔을 연상시킨다. 천사의 타락에 대한 유다적 사고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4절 이 묘사는 다니 8.10에서 유래한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로 상징되는 “작은 별”이 하늘에 닿기까지 자라서 별의 삼분의 일을 땅에 떨어뜨린다. 여기서는 하느님의 거대한 적이 가진 오만의 모습을 보여준다. 5절 전형적인 히브리인들의 표현법으로 묘사된 이 구절은 이사 66.7에서 유래한다. 명백히 메시아로 지적되는 이야기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을 거느려 다스릴”운명을 타고났다. 시편 2.9는 묵시록에서 여러 번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된다. 창세 3.15에서 예고된 대립이 이제 그 결정적 순간을 맞이한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로 사탄의 패배를 자축하게 된다. 6절 이스라엘이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출되고 광야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갔듯이, 여인인 하느님 백성은 악의 세력에서 벗어나 광야에서 홀로 적그리스도의 기간 동안 주님의 보호 속에 살 것이다. 이집트 탈출 이후 광야는 사실 성서에서 전능하신 하느님 보호의 상징이 되었다. 광야는 동시에 때때로 하느님이 사람들을 당신께로 이끌기 위해 사용하시는 시련의 장소로도 상징화한다. 제2독서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께 속한 이들입니다.> 24 그러고는 종말입니다. 주해 20절 “맏물”이라고 번역된 아파르케는 그 해에 맨 먼저 거두어들인 과일이나 곡식을 가리킨다. 맏물은 구약성서에 의하면 나중에 거두어들이는 것들을 대표해서 하느님께 봉헌되었다. 16.15와 로마 16.5에서는 공동체 구성원 중에서 맨 먼저 그리스도 신앙인이 된 사람에게도 이 단어를 적용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맨 먼저 부활한 분, 곧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골로 1.18에서도 같은 뜻으로 그리스도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맏이”시라고 한다. “잠든 이들의 맏물”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이들의 부활을 시간적으로뿐 아니라 인과적으로도 연결시킨다. 맏물이 있으면 그 다음에 다른 소출들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부활 다음에는 그리스도안에 죽은 이들의 부활은 종말론적 완성의 시작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영이 종말론적 완성의 “첫 선물” 또는 “보증”이라고도 불린다. 22절 22절에서는 시제에 유의해야 한다. 앞 문장은 “아담안에서 ... 죽듯이”라고 현재형, 뒷 문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려질 것이다”라고 미래형인데 의미가 깊은 표현이다. 죽은 이들의 부활은 미래에 그리스도의 내림 때에야 비로소 있을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여기서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미래형으로 표현하는 것은 고린토 교회 열광주의자들의 현재적 종말론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이가 죽듯이”라는 표현에 대한 가장 좋은 해설은 로마 5,12-21에 나오는 아담-그리스도 동형론이다. 이에 의하면 옛 인간에 속한 사람들의 죽음은 단지 아담의 범죄에 운명적 결과일 뿐 아리나 그들 자신이 지은 죄와 결과이기도 하다. 23절에서 미래에 살아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내림때 그분께 속할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여기 22절의 “모든 이”는 “죽은 모든 인류”를 의미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이”. 또는 18절의 “그리스도안에 잠든 이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위한 구원의 길을 열어놓고 모든 이를 초대하신다. 그러나 모든 이가 구원에의 초대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15장의 이 단락에 있어 비그리스도 신앙인들의 운명에 없는 것을 근거로 어떤 성급한 주장을 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바오로의 주관심은 그리스도 신앙인으로서 죽은 이들의 운명에 있다. 22절에서와는 달리 요한 5,28-29에 의하면 선인들뿐 아니라 죄인도 부활하여 행실이 따라 인자의 심판을 받게되리라고 되어 있다. 한편 2고린 5.10에서는 바오로도 생실에 따른 그리스도의 심판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말하는 심판도 “그리스도 신앙인들의 받게 될 심판”이다(3.13참조) 23절 나머지 역사가 다음 3단계로 묘사된다. 1단계: 그리스도의 부활부터 내림 때 죽은 이들의 부활까지: 2단계;그리스도의 내림 때부터 그리스도가 자신의 통치를 하느님께 넘겨드릴 때까지: 3단계; 모든 역사의 완성으로서의 보편적이고 영원한 하느님 아버지의 통치(다스림). 흔히 “재림”이라고도 번역되는 파루시아는 본디 “다시”라는 의미는 없고 “있음, 현존 또는 도래”를 의미한다. 부활하여 헌양되신 주 예수의 “내림”은 사실상 “다시 임하심”이므로 흔히 “재림”으로 번역된다. 직역하면 “그리스도의 사람들” 24절 24-28절에만 “모든”이 열 번이나 나오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다스림과 하느님의 다스림의 보편적 성격을 강조하는 동시에 여기서 논의되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이들의 부활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종말”은 “완성”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여기 세 용어 “지배”와 “권력”과 “권세”는 하느님의 다스림에 맞서는 적대세력을 의미한다. 25절 시편 110.1.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일찍부터 이 시편 말씀을 그리스도의 부활과 현양에 적용했다. 26절 죽음이 없어짐으로써 이사 25.8의 예언이 성취된다. 바오로는 죄와 율법뿐 아니라 죽음까지도 인간을 억압하는 세력으로 의인화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죽음은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한다. 죽음까지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갈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죽음이 결정적으로 제거되는 것은 역사의 종말에 가서다. 그 때까지 죽음은 사람들에게 그 힘을 발휘한다. 27절 “굴복시키는 분”을 하느님으로 보느냐 그리스도로 보느냐에 따라 번역이 좀 달라진다. 그러나 28절을 보면 “굴복시키신 분”은 하느님이시다. 복음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주해 39절 원문에는 “유다 산골 도시”. 흔히 제관들은 예루살렘 주변 마을에 살았다. 엘리사벳이 살던 마을은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6키로미터 떨어진 에인가림이라는 전설이 있는데, 이곳은 6세기부터 생긴 것이다. 42절 마리아에 대한 칭송은 드보라가 야엘을 칭송한 말을 연상케 한다. “켄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여자들 가운데 축복받아라”. 또한 우찌야가 유딧을 칭송한 말을 연상케 한다. “당신은 세상 모든 여자들 가운데 ... 축복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께 대한 칭송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칭송한 말과 비슷한다, “너희 태중의 열매는 ... 축복받으리라”(신명 28.4). 43절 예수님은 “주님”이시라는 말이 루카복음에 처음으로 나온다. 메시아로서 주님이시라는 뜻이다. 45절 마리아는 단순히 예수님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복되신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되리라는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복되시다. 루카는 8,19-21; 11,27-28에서도 같은 생각을 드러내 보인다. 47절 시편 35,9: 1사무 2,1-2; 하바 3.18 참조. 48절 루카는 본디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이 부르던 노래를 마치 마리아 자신의 노래인 양 소개하면서 48절을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여종”은 38절의 같은 낱말을 이어받았고 “복되다 하리니”는 45절의 “복되도다”를 반복한 것이다. 49절 49절은 본디 46-47절과 직결되어, 시인이 하느님을 가리고 흥겨워하게 된 까닭을 밝혔을 것이다. 칠십인역 스바 3,17; 시편 89,9에서 하느님을 “능하신 분”이라 일컫는다. “큰 일”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룩된 구원을 뜻한다. 50절 하느님은 능하고 거룩하실 뿐 아니라 또한 자비로우시다. 무상으로 은혜를 베푸신다는 뜻이다. 51절 “당신 팔로 힘을 쓰시어”는 하느님이 능력을 드러내셨다는 뜻이다. 51ㄴ-54절은 예수님의 진복선언과 불행선언을 연상시킨다. 54절 54절의 “자비를 기억하시어”는 55절의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던 대로”, 72절의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도다”와 상통한다. 하느님께서는 언약과 계약을 잊지 않고 성실히 지킨신다는 뜻이다. 55절의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던 대로”는 우선 아브라함에게 하신 구원의 언약을 뜻한다. 54-55절과 관련하여 이사 41.8-9; 미가 7.20; 시편 98.3 참조.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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