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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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8-21 | 조회수772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1900년 무렵부터 마리아께 ‘여왕’의 영예가 주어져야 한다는 요청이 많았다. 1925년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이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정해지면서 이러한 요청은 더욱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1954년 비오 12세 교황은 마리아께서 여왕이심을 선언하고 해마다 5월 31일에 그 축일을 지내도록 하였다. 그 뒤 로마 전례력의 개정에 따라, 마리아를 천상 영광에 연결시키고자 성모 승천 대축일 뒤로 옮겼으며, 축일 이름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로 바꾸었다. 이날 교회는 성모 승천의 영광을 거듭 확인하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도구가 되신 것을 기린다. 제1독서 <주님의 이름이 여러분 가운데에서 영광을 받고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3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 때문에 4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이 그 모든 박해와 환난을 겪으면서도 보여 준 11 우리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주해 데살로니카 신자들에 대한 감사와 기도 1,3-12는 도입부다. 바오로눈 먼저 감사기도를 드리고, 심판에 대해 언급한 후. 이제 청원기도로써 끝을 맺는다. 3절 데살로니카 전서에서와 같이 신자들의 신앙과 사랑과 인내를 대견스럽게 여기고 감사한다. 인내는 희망의 표현이다(1데살 1.3 참조). 4절 하느님은 당신 나라를 위해 고난당하는 사람에게는 행복을 주시고, 그들을 박해하는 자에게는 괴로움을 주신다. 심판 날, 즉 예수께서 나타나시는 날은 박해자가 고통받고 억눌렸던 자가 위안받게 되는 전환점이다. 4절 이하의 “괴로움”(고난,환난)은 마지막 시대에 하느님의 나라를 받들 사람들이 반드시 겪기로 되어 있는 “억눌림”이다. 11절 “선의”란 하느님의 선의로 볼 수도 있으니. 그렇다면 이 부분은 “하느님께서 ... 좋은 일을 하시려는 온갖(당신의) 선의와 신앙의 실천을 권능으로 성취하시도록”으로 번역한다. 12절 히브리인의 사상에 의하면 “이름”이란 그 이름을 가진자의 본체와 활동을 나타낸다. 예수의 이름 곧 예수를 받드는 것이 초대교회의 특징이다.(1사도 2.38; 3.16등 참조). 복음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14)·1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16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19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주해 13절 첫째 불행선언. 13절의 병행문이 루카 11.52에 있는데, 마태오의 형태가 더 신빙성이 있다.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은 동족을 하늘나라로 인도할 권능과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 들어가지 않을뿐더러 들어가려는 동족에게도 하늘나라를 잠가 버렸다. 그 결과 그들이 지녔던 “하늘나라의 열쇠”가 시몬 베드로에게로 넘어갔다. 13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리스도교계 예언자, 현자, 율사들을 박해하고 처형한 사실, 곧 그리스도 신앙을 이단시해서 배척한 사실을 뜻하겠다. 14절 14절은 극히 일부 사본에만 있는 것으로, 후대 필경사들이 마르 12.40(=루카 20.47)을 이 자리에 삽입한 것에 불과하다. 15절 15절 둘째 불행선언은 마태오복음에만 있다. 기원전 1세기에 이집트에서 쓰인 요셉과 아세낫 소설. 58년경 바오로가 고린토에서 쓴 로마서 2,19-20. 유스티누스 교부가 155년경에 집필한 트리폰과의 대화, 121.4;122.1을 보면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을 유다교로 개종시키려고 활발히 전도했다. 이방인이 할례를 받고 율법을 다 지키면 정식으로 유다교인이 된다. 만일 할례를 받지 않고 일부 율법만 지키면 반쪽 유다교인이 되었는데, 이런 이를 일컬어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지옥의 아들“은 ”나라의 아들“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16절 섯째 불행선언도 마태오복음에만 있다. 예수님 자신은 맹세 자체를 금하셨다. 그런데 우리단락에선 절대로 맹세하지 말라고 하지 않고, 맹세에 대한 오해만 바로잡는다. 곧, 맹세해 놓고도 그것은 맹세행위가 아니라고 해석하는 유다교 율사들의 곡해를 규탄한다. 누가 성전 또는 제단을 증인으로 삼아 맹세하지만, 성전 또는 제단은 하느님을 가리키는 우회적 표현이므로 당연히 맹세가 성립된다는 것이 16-22절의 논지다, 바꾸어 말하면 성전 또는 제단을 두고 한 맹세도 존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샛째 불행선언에선 맹세 성립 여부를 논한다. 곧, 결의론을 전개한다. 이는 예수님의 지침과는 거리가 멀다. 챗째 불행선언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관행을 반영한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맹세 절대 금지령을 완화하여 곧잘 맹세를 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철저한 지침들을 완화한 사례들은 5.32; 19.9: 23,2-3에서도 발견된다. 어록(15,14=루카 6.39)에서 따온 표현, 로마 2.19에도 같은 표현이 있다.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 안에 있던 황금 촛대, 지성소에 안치된 계약함을 덮은 속죄판 등을 생각할 수 있다. 22절 5,34에서 빌린 표현.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웃통을 벗고 짧은 바지만 입고 현관문을 열어 놓고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이가 문앞에서 “아저씨 나 쌀좀 주세요. 한끼도 안먹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벌떡일어나 내가 먹고 있는 쌀을 비닐봉투에 담았습니다, 그런데요 나의 벗은 모습이 배가 불룩이 나와 있어서 쌀이 아깝기보다는 부끄러워서 혼이 났습니다. 그 사람처럼 요즘에도 쌀이 없어서 먹을 양식이 없다는 것에 그것이 뭐 어쩌구 할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미안합니다. 내가 욕심이 많았는가 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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