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3 연중 제21주간 화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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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8-22 | 조회수642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여러분이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14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주해 1절 2.1부터 바오로는 데살로니카 교회에서 일어난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다. 2절 데살로니카에는 재림이 이미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오로는 내세울 만한 근거, 즉 예언의 은사에 의한 특별계시, 이성적 추리에 의한 논거, 바오로가 썼다는 글등은 모두 가치가 없다고 한다. 여기서 바오로는 단순히 여러 가지 가능성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데살로니카 신도들이 내세운 근거를 열거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다만 그러한 현혹적인 소문들이 데살로니카에 돌고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영이나 말이나 우리가 썼다는 편지”를 “우리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영이나 말이나 편지”로 번역할 수도 있다. 3절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과 8절의 “무법자”라는 표현은 정관사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데살로니카 신자들이 이미 잘 알고 있던 개념이다. 소위 “반(反)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불법자를 “불법의 사람”, 멸망한 자를 “멸망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식 표현이다. 이 표현들은 다니 11.36:에제 28.2를 연상하게 한다. 다니 7.-11장의 환상에 등장하는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이 “불법의 사람”의 원형인 것 같다. 6절 반그리스도는 “무엇에 붙들려”있기 때문에 아직은 세력을 떨치지 못하고 따라서 세말이 늦어진다. 반그리스도를 “붙들고 있는” 이가 누구 혹은 무엇인지 당시 신자들은 알고 있었겠지만 지금을 알 수 없다. 15절 바오로는 데살로니카 전서 이외에도 데살로니카에 여러 통의 편지를 보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전통이란 바오로가 원시교회로부터 물려받고, 자신이 세운 교회 신자들에게 전해준 신앙생활 규범이다. 16절 16-17절에서는 놀랍게도 그리스도가 성부보다 앞에 나온다. 그리스도와 하느님이 공동주어가 되어 신도들을 “격려하시고 굳세게 베푸신다”. 따라서 예수와 성부와의 완전한 일치가 드러난다. 복음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더 중요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한다.> 주해 23절 23-24절은 넷째 불행선언이다. 23절의 병행문이 루카 11.42에 있으니 어록에서 따온 말씀이다. 원래는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와 곡식에 한해 십분의 일세를 바쳤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정세 범위가 확대되어 과일과 가축의 경우에도 십분의 일세를 바쳤다. 예수 시대에는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 따위 양념 향신료에까지 확대했다. 시라는 모양이 흰 참깨와 비슷하고 소회향은 검정 참깨 비슷한데, 주로 빵이나 과자를 구울 때 향기와 맛을 돋우는 향신료로 사용한다. 이들 신물 번역에 도움을 주신 이창복 박사님께 삼가 사은의 정을 표한다. 23절에서는 십일조보다 윤리를 중요시하여 “율법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로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꼽는다. 첫 낱말 “정의”의 그리스 원어는 크리시스로서 본디 “법”또는 “재판”을 뜻한다. 그러니까 합법적 재판, 의로운 재판을 뜻한다. 하느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신다는 말씀을 마태오는 두 차례나 인용했다. 사람들 사이의 “신의”에 관해선 전도 3.3; 14.22; 지혜 3.14; 집회 1.27;15.15를 보라. 십일조도 바쳐야겠지만 윤리는 더욱 지켜야 한다는 말씀을 눈여겨보면,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십일조를 바쳤음을 알 수 있다. 23절에선 다만, 인륜보다 인위적인 십일조를 앞세우는 가치의 전도를 나무랄 뿐이다. 24절 24절은 마태오복음에만 수록된 속담 같은 말씀이다. 가장 작은 곤충과 가장 큰 짐승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가치의 전도를 비꼬신 말씀이다. 25절 다섯째 불행선언의 병행문이 루카 11.39에 있으나 루카에는 불행선언 형식이 아니다.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은 혹시라도 그릇이 불결한 상태에 있을세라 식사 직전에 반드시 그릇을 다시 닦는다. 이처럼 그릇 닦는 데는 신경을 곤두세우는 그들이었지만 또 한편 “착취와 무절제”를 일삼았다. 사실 그릇에 담긴 음식물을 살펴보면 “착취”해서 모은 것이요 “무절제”하게 삼키는 것이다. 그들이 정결례는 잘 지키지만 윤리적으로는 타락한 점을 탓하시는 말씀이겠다. 그러니까 앞에 나온 넷째 불행선언에서처럼 가치의 전도를 나무라셨다 하겠다. 아울러 뒤에 나올 여섯째 불행선언에서처럼 겉 다르고 속 다른 위선을 나무라셨다고 풀이할 수도 있겠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예수님께서 마리아께 태어나서 지상에서 사시고 다시 하늘나라로 갔다는 내용을 어머니 품에 안겨서 어머니와 예수님께서 세상을 바라보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으로 시를 지었는데 그중 한 대목을 고친 분이 있었다. “... 나 밑으로 태어나 ...”인데 이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분은 “...아래에서 태어나...”라고 고쳤다. 그리고 그 어떤 분은 “...위로부터 태어나야..”한다고 말씀을 하신다. 이것을 세부적으로 살펴본다면 “...하늘에서 태어나...”가 맞는 말씀이라고 하신다. 그런데 분명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태어난 것이 맞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이미 하늘에서 태어나 땅으로 오셨는가? 하늘에서 땅으로 오실 때 즉 지상에 살고 계신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지 않는가? 어떤가? 아기가 자라는 곳인 자궁은 궁전이다. 우리는 이를 예수님이 마리아의 태중에 있을 때를 황금궁전에서 사셨다고도 부른다. 그래서 저는 하늘에서 땅으로 오시는 것을 “..밑으로 태어나...”라고 쓴 것이었다. 참 아깝다. 시를 외우고 다니다가 너무 오래되어 잊어버렸다. 틀린 시를 뭐하러 외우고 다니느냐는 것 때문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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