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5 연중 제21주간 목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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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8-24 | 조회수566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3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7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인사와 감사 1,1-9는 그리스도론적으로 매우 밀도깊게 짜여 있다. “그리스도”라는 단어가 아홉 번, “예수”가 여덟 번, “주”가 다섯 번 나온다. 1-3절에만 “하느님”이 세 번, “예수 그리스도”가 네 번 언급된다. 그리스도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본에서 야훼께 적용하는 퀴리오스라는 칭호를 2.8절에서 예수께 적용한다는 점이다. 1절 1,1-3은 바오로의 편지 양식에서 “서두인사” 부분에 해당한다. 바오로는 일반적으로 당대의 그리스어 편지 양식을 따른다. 그 시대의 그리스어 편지 서두인사는 일반적으로 발신자의 이름, 수신자의 이름, 카이레인의 세 요소로 구성된다. 바오로는 이 세 요소 사이사이에 긴 수식어를 붙이는데 이 수식어들은 깊은 신학적 의미가 있다. 여기서 “형제”란 “그리스도 신앙인”을 뜻한다. 유다인은 가족이나 친척이 아니라도 가끔 서로 “형제”라고 불렀다. 바오로에 의하면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깊은 의미에서 참으로 서로 “형제자매”다. 사도 18.17의 소스테네라는 회당장이 1절의 공동발신자와 동일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아무튼 소스테네는 바오로와 함께 고린토 전서의 공동발신자로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고린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명망있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2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되었다”라는 표현은 거룩함의 은사적 성격을 드러낸다. 즉 거룩함은 선사받은 것이지 성취해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들과 우리들의”라는 말이 원문에서는 2절 끝에 있는데 뜻이 모호하다.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하나는 위에 채택된 번역처럼 이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과 우리들의 (주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후자로 보기에는 수식되는 말과 수식하는 말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이 표현은 “야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마다 구원을 받으리라”는 요엘 3.5를 배경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로마 10.13과 사도 2.21에서는 이 말씀을 취하면서 “야훼인 주님”을 “예수인 주님”으로 재해석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인”이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전문표현이 되기도 한다. 원문에서는 2절의 쉰(“와 함께”)이후 문장을 어디에 연결시키느냐에 따라 몇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위에 채택된 번역도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이 번역은 쉰 전치사의 의미와 바오로의 편지 양식을 고려하며 수신자들과 다른 모든 신앙인과의 연대성을 잘 드러낸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 지칭한 바오로는 이제 고린토 그리스도인들을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라고 부른다. 부르신 주체는 하느님이다. 바오로는 여기서 거룩함에로 부르심받음과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함을 어느 특정 지역에만 국한 되지 않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라고 본다. 2절은 바오로의 교회론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많다. 교회의 보편성과 구체성, 교회의 거룩함, 하느님이 불러모으신 “하느님의 교회”. 보편적인 “하느님의 교회”가 “고린토 공동체”라는 지역교회에서 구체화한다. 바오로가 말하는 교회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집회”로서 “하느님의” 교회다. 에클레시아(교회)라는 말만으로는 바오로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교회관을 표현하기에 부족했을 것이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일반 사람들에게 에클레시아란 “시의 제반 사항을 토의하기 위한 시민들의 집회”라는 세속정치적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에클레시아의 종교적 사용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처음 생겨난 것은 아니다. 이미 칠십인역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집회”를 뜻하던 히브리어 카할을 에클레시아로 번역했다. 카할이란 동사로는 “소집하다”, 명사로는 “집회”를 뜻한다. 이 칠십인역 용례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에클레시아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로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받은 신앙인들의 모임”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3절 당대의 일반 편지 양식과 비교하여 바오로의 편지가 다른 점은 무엇보다도 카이레인(인사합니다)이라는 간단한 인사를 “은총”(카리스)과 “평화”의 축원으로 대체한다는 점이다. 은총과 평화는 바오로에게 있어 하느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선사하시는 구원을 표현하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개념이다. 특히 “은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행위 전체를 종합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한다(3고린 8.9). 그래서 그런지 바오로 편지들의 시작과 끝은 모두 “은총과 축원”을 포함한다. “평화”는 여기서 “내적 평온”만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하느님과의 관계의 “온전함”(히브리어 샬롬은 “온전하다”는 뜻을 내포한다)을 표현한다. 4절 “선사된 하느님의 은총”: “선사된”(주어진)이라는 수식어가 붙음으로써 은총의 무상적 성격이 강조되어 있다. 바오로는 “주어진 은총”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일부 사본에는 “나의”가 없다. 바오로는 갈라디아서를 제외하고는 서두인사 다음에 으레 “하느님께 대한 감사”를 한다(2고린에는 “찬양”). 갈라디아서 서두에 “하느님께 대한 감사”가 없는 이유는 갈라디아 그리스도 신앙인들의 상태가 바오로를 걱정에 사로 잡히게 할 만큼 나빴기 때문인 것 같다. 이렇게 편지의 서두인사 다음에 즉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바오로의 태도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은총과 평화를 선사받고 사는 신앙인들이 하느님께 응답하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바로 감사의 태도라고 바오로가 이해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5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선사된 하느님의 은총”(4절)을 고린토 교우들이 풍요하게 받았다고 하면서 그 여러 “은총의 선사”가운데 특별히 “언변”(로고스)과 “지식”(그노시스)을 말한다는 점은 편지 후반과 관련하여 유념할 점이다. “지식”의 풍요함 때문에 우쭐해져 오히려 “사랑”을 소홀히하는 고린토 교우들의 상황을 배경으로 바오로는 지식과 언변을 매우 비판적으로 다룬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진실합니다”. 6절 “그리스도께 대한 증언”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겠다. “그리스도께 대한 증언”은 바오로와 같은 선교사들이 했던 복음선포를 뜻한다. 7절 “주님의 날”은 구약성서에서 종말에 있을 “야훼의 심판 날, 분노의 날”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야훼의 날”은 불의한 이들에게는 “처벌의 날”이지만 의인들에게는 “구원의 날”이기도 하다. 바오로에게 이 “야훼의 날”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다. 9절 또는 “진실하십니다”로 번역. 여기서 “신실하다/진실하다”라고 번역되는 형용사 피스토스는 “거짓이 없다”는 의미의 “진실하다”를 넘어서 약속을 이행할 능력 면에서 “믿을 만하다”는 의미가 있다. 하느님이 당신 약속에 신실하시다는 것은 구약성서의 주요주제 가운데 하나다. 이 하느님의 신실성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와의 친교에로 부르시는 데서 현실화한다고 바오로는 본다. 1-2절에 나왔던 “부름받은 처지”에 대한 언급이 다시 나온다. “친교”라는 말이 10.16에서는 그리스도와의 성사적 친교에 적용된다. 바오로가 흔히 사용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칭호에 “그분의 아들”이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는 점은 유의할 만하다. 바오로에 의하면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통해 “하느님의 아들들”이 되어 “하느님과 그의 아들 예수의 친교”에 초대받았다. 8절에 나오는 “주 예수의 날”이 구약성서적 배경에서 “심판의 날”이라는 성격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하느님이 분노나 심판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당신 아들과의 친교로 부르셨다”는 9절은 기쁜 음조를 띠고 있다. 복음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45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49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 주해 42절 42절은 마태오가 마르 13.35를 옮겨쓰면서 대폭 줄인 것이다. 마르 13,34-36은 문지기 비유다. 종말의 시기를 모르는만큼 “깨어 있으시오”. “준비하고 있으시오”라고 한다. 43절 도둑을 지키는 집주인 비유역시 어록을 옮겨쓴 것이다. 이 비유는 이른바 위기 비유류에 속한다. 곧, 종말 위기가 언제 닥칠지 모르니 늘 대비하고 있으라는 뜻을 지닌 비유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순간이 종말이라고 여기고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이 되면 인자가 내림하여 하느님 나라를 이룩한다고 보았다. 즉, 하느님의 나라와 인자 내림을 거의 동시 사건으로 본 까닭에 “하느님의 나라가 옵니다”를 “인자는 옵니다”로 고쳐쓸 수 있었다. 또한 1세기 교회에서는 이 비유의 영향을 받아, 예수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갑자기 온다거나 또는 예수 주님은 도둑마냥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는 표현을 즐겨 썼다. 청지기 종 비유 위의 비유에서처럼 종말 위기에 늘 대비하고 있으라는, 큰 비유 네 가지가 연이어 나온다. 그 첫째가 청지기 종 비유인데, 역시 어록을 옮겨쓴 것이다. 예수 친히 청지기 종 비유를 발설하셨다고 보는 설이 있다(슈타켄부르크, 봐이즈). 즉 신국이 언제 도래할지 모르니 방심하지 말고 이스라엘 백성을 선도하라고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촉구하신 비유라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교회 일각에서 이 비유를 창작했다고 보는 설도 만만치 않다(그닐카). 즉, 예수 내림이 지연된다는 구실로 교회 지도자들이 소임을 다하지 않을세라 염려해서 교회에서 창작한 비유라는 것이다. 비유의 역점은, 종말이 지연된다 해서 동료들을 마구 다루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럼 마태오는 누구를 향해 이런 충고를 했나? 자기 교회 모든 신도에게 한 충고라는 설(슈낙켄부르크), 교회 지도자들에게 한 충고라는 설(그닐카, 산드)이 맞서 있다. 비유의 요소들을 면밀히 살펴보면(45절의 “자기 집 하인들을 다스릴 책임을 맡겨...”) 아무래도 교회 지도자들에게 한 충고일 것이다. 45절 병행문 루카 12.42에선 “청지기에게”. 48절 “내 주인이 늦으시는구나”는 병행문 루카 12.45에도 있으니 분명히 어록에도 있었다. 나아가, 이는 비유 이야기의 흐름에 꼭 필요한 요소인만큼 맨 처음부터 비유에 들어 있었다. 마태오와 루카의 편집사적 관점에서는 예수 인자의 내림이 늦어지는 현상, 즉 내림 지연 현상을 가리킨다.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 비유에서도 “신랑이 늦어진다”(25.5 참조: 25.19). 49절 종말의 때는 알 수 없다는 말씀은 24.36.39.44.50;25,6.13에 되풀이된다. 51절 마태오는 단죄받은 이들의 절치통곡을 즐겨 말한다(8.12;13.42;50.22.13;24.51;25.30).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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