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6 연중 제21주간 금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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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8-25 | 조회수962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20 지혜로운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율법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22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25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주해 17절 거두절미해서 이 문장만 읽고는 바오로가 세례의 가치를 부인하거나 부차적으로 여겼다고 본다면 성급한 판단이다. 17절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전후 문맥과 세례에 관한 바오로의 다른 표현들을 감안해야 한다.세례는 단지 율법규정을 지키는 예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결합인 신앙의 수행으로 파악된다. 이렇게 볼 때 세례는 “율법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의 수용이다. “말의 지혜”라는 말에서 “지혜”는 능력 또는 솜씨를 뜻한다. 바오로 당시의 그리스인들은 정확한 규칙에 따르는 수사학적인 기교를 높이 평가했다. 17절에 담긴 뜻은 2,1-5에서 더 펼쳐진다. 2.5는 왜 “말의 지혜”(말솜씨)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는지 설명할 것이다. 19절 1,18-25에서는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야 말로 하느님의 능력이며 지혜라고 강조함으로써 하느님의 지혜와 세상 지혜를 대조시킨다. 21절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가 활동한 창조계에 자리해 있으므로 하느님에 대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의 배경에는 의인화한 지혜가 창조 때 함께 이용했다는 구약 지혜문학 전통이 있다. 22절 유다인/헬라인 구분은 헬라인.이방인 구분을 원용한 것이다. 유다인들의 표징 추구나 헬라인들의 지혜추구나 결국 인간적 안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하나는 메시지의 신빙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다른 하나는 지식을 만족시키는 이치를 추구한다. 바오로가 비판하는 것은 표징이나 지혜를 찾는 것 자체가 아니라 신앙을 받아들일 때 그것들을 조건으로 삼는 데 있다. 24절 언뜻 보면 “십자가의 선포”는 사람들의 기대와 정반대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하느님의 능력의 표징인데, 그대신 무능력의 표징이라 할 수 있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선포되며,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지혜인데 그 대신 어리석음의 표징이라 할 수 있는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선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이 어둠을 극복하고 믿음을 갖게 된 사람에게는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인간이 기대하던 참 지혜이며 하느님 능력의 실현으로 나타난다. 복음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주해 1절 “하늘나라는 ...와 같을 것입니다”라는 서두는 비록 시제가 다르기는 하지만, 가라지 비유의 서두, 무자비한 종 비유의 서두, 임금의 아들 혼인잔치 비유의 서두와 동일하다. 구약성서에서는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혼인을 맺는다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곧, 신랑은 야훼를, 신부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은유로 나타난다. 10절 10ㄷ-12절의 변형태가 마태 7,22-23;루카 13.25에 있다. 따라서 마태오가 10ㄷ-12를 어록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있다. 13절 “여러분은 깨어 있으시오”. “여러분도 준비하고 있으시오”. 종말의 때는 미지수라고 마태오는 거듭 강조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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