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9 연중 제23주간 금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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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9-08 | 조회수605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나는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18 그렇다면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24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26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주해 16절 16-17절: 17절의 “관리”는 4,1-에 나왔던 관리인을 연상시킨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관리인은 흔히 종이 있다. 종은 보수를 받지 않는다. 반면에 어떤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인은 일을 할 경우에 보수를 받았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 자처한다. 그래서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를 복음으로 선포하는 일을 맡아서 했다고 하여 보수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자신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일을 했을 뿐이다, 필립 3.12의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혔다”라는 말에는 바오로가 사도적 삶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하느님의 힘을 저항하거나 피할 수 없이 강한 것으로 느끼는지가 잘 나타난다. 18절 18절에서 바오로는 한편 자신이 자유와 권리가 있다는 것을, 다른 한편 자발적으로 그 자유와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언뜻 보면 18ㄱ절은 17절 주석과 배치되는 듯하나 자세히 보면 뜻이 통한다. 바오로가 사회학적으로는 철저히 자유인으로, 신앙 차원에서는 철저히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처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자유와 권리와 보수에 관한 16-18절의 모호한 말들이 좀 더 분명해진다. 19절 19-23절에서 바오로는 자신의 선교 자세에 대해 말하면서 1절에서 말한 자유 문제를 더 발전시킨다. 바오로에게 있어 사람들로부터의 자유는 하느님의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한 자유다, 그런데 사람들로부터의 자유는 사람들을 떠남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삶은 동시에 그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도 전적으로 헌신하게 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1데살 2,1-12를 보면 거기 7-12절에 묘사된 사람들에 대한 헌신적 사랑은 1-6절에 묘사된 하느님 안에 충실히 머무는 태도에 근거한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처하는 바오로가 이제는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고 한다. 이 자세는 “복음선포”라는 선교적 목표를 분명히 가지고 있다. 자유와 종이라는 단어가 역설적으로 사용된다. 22절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다”라는 바오로의 선교자세를 기회주의로 볼 수는 없다. 바오로의 모든 활동은 만민에게 그리스도를 복음으로 선포하여 그들이 그분을 믿음으로써 구원되도록 한다는 확고한 목표를 지향하며, 사리사욕을 추구하기는커녕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기 이익을 희생할 각오까지 되어 있기 때문이다. 23절 여기서 바오로가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은 “내가 남들에게는 (복음을) 선포하면서 나 자신은 실격자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라는 27ㄴ절과 관련된다. 그러나 23절에서는 “함께”라는 뜻이 강조된다. 즉, “선교 활동의 결과로 되도록 많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함께 복음을 믿고 함께 누리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겠다. 27절 “치다”의 원어는 본래 권투 전문용어로서 직역하면 “눈 바로 밑의 얼굴 부분을 가격하다”라는 뜻이다. 경기에 승리하기 위해 철저히 절제하며 단련하는 운동선수들의 예를 통해 바오로가 고린토의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반육체성이나 금욕주의가 아니라 영원한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신앙생활이다. 중요한 것은 이 노력이 이기적 동기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랑의 동기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복음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주해 39절 39절은 상징어. 그 변체가 마태 15.14에 있는데 바리사이들을 눈먼 길잡이라 한다. 그들이 율법의 세부 규정은 강조하면서 그 근본 취지는 망각했기 때문이다(마태 23.24;로마 2.19 참조). 40절 40절의 변체가 마태 10,24-25;요한 13.16; 15.20에 있다. 단절어의 뜻인즉, 모름지기 제자는 예수 스승을 넘어설 생각을 말고 언제나 그분을 척도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41절 자기 자신은 큰 허물을 지닌 주제에 남의 작은 허물을 고치려는 짓거리를 탓하시는 비유다. 마태 7,3-5에 변체가 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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