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2 연중 제24주간 월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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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9-11 | 조회수900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이 있다면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19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에 분파도 있어야 참된 이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23 사실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33 나의 형제 여러분, 주해 17절 17절에는 약간의 본문비평적 문제가 있다. 어떤 사본을 취하느냐에 따라 “이것”은 “방금 앞에서 말한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다음과 같은 말”을 의미할 수도 있다. 17-34절에 집중적으로 나오는 “함께 모이다”라는 동사는 이 단락에서 말하는 모임이 공동체 전례 모임임을 말해준다. 18절 공동체가 함께 모여 무엇을 하는지는 14.26 참조. 여기서 말하는 “분열”은 주님의 성찬을 거행하러 모였으면서도 끼리끼리 모이는 현상, 특히 없는 이들과 있는 이들의 갈라짐이다. 20절 고린토 공동체가 “주님의 성찬”을 거행하러 모인 때는, 20-22절에서 보이듯이 노예나 가난한 사람도 포함하여 공동체 전체가 모일 수 있으려면, 저녁이었던 것 같다. “주님의 성찬”: 초대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가 주님의 최후만찬을 기념하며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거행하던 성찬례를 가리킨다. 흔히 “성체성사”로 번역되는 에위카리스티아는 본디 빵과 포도주를 들기 전에 하느님께 드리던 “감사”를 뜻하던 말인데, 벌써 1세기 말엽부터 교회에서는 주님을 기념하여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가 거행하는 성차례와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에위카리스티아란 이 예식 전체를 가리킬 수도 있고 또는 이 예식 때의 음식 또는 이 예식 때의 감사기도를 가리킬 수도 있다. 21절 “자기의 만찬”은 20절의 “주님의 성찬”과 대조를 이룬다. 고린토 공동체는 주님의 성찬을 거행하기 전에 자기가 가져온 음식 중 일부로 보통 식사를 하고 이어서 주님의 성찬을 거행했던 것 같다. 바오로가 개탄하는 것을 보면 가져온 음식은 함께 나누도록 되어 있었을 것이다. 22절 33-34절 참조. 22절에서 바오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이라고 본다. “하느님의 교회”라는 말에서는 “하느님의”라는 수식어가 강조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의” 단체들과 달리 교회는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그분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로 부르심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고회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의 구성원들이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신 주님을 기념하며 “부활하여 현양되신 주님과의 친교”와 이 친교를 바탕으로 “신자들 서로간의 친교”의 사랑을 어느 곳에서보다도 밝히 드러내어야 하는 “주님의 성찬”을 거행하려는 바로 그 자리에 한편에서는 굶는 사람이 있고 다른 편에서는 잘 먹고 취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결국 그들을 부르신 하느님의 뜻을 전적으로 저버리는 것이며 따라서 “하느님의 교회”를 경멸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바오로는 개탄한다. 문맥상 여기서 바오로는 특히 부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없는 사람들은 일 때문에 저녁때 어느 가정집에서 있었을 주님의 만찬에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며 가져갈 음식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부자들이 이런 “없는 사람들”을 기다려주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서둘러 먹곤 했던 것 같다. 바오로는 공동체의 “친교”를 근본적으로 깨뜨리는 이런 이기적 식사와 그 뒤에 거행되던 주님의 성찬이라는 성사가 무관한 것이 아님을 바오로가 신자들에게 깨우쳐준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바오로는 일상적인 삶과 성사의 연관성을 강조한다. 23절 “주님께로부터 전해받았다”라는 말은 두 가지로 알아 들을 수 있다. “주님께까지 소급하는 전승을 전해받았다”고 알아듣는 것. 갈라 1.12에서 그토록 강조한 것처럼 어떤 인간적 중재를 거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았다”고 알아듣는 것이다. 둘다를 진지하게 고려하면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바오로가 고린토 신자들에게 전한 것은 역사상 예수까지 소급하는 전승이지만 이 전승의 지속적 보증자는 현양되는 주님으로서 성사에 현존하시는 주님이다. 23절의 두 동사 “전해주다”와 “전해받다”는 랍비들이 전승 문장들을 전수하는데 쓰이던 전문용어였다고 한다. 이렇게 바오로 자신도 23ㄴ-25절의 내용이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전해받은 것을 전해준다”고 분명히 밝힐 뿐 아니라, 23ㄴ-25절의 글을 예수의 최후만찬에 관한 다른 문헌들과 공관대조를 해보면 순서와 말마디까지도 상당부분 서로 일치한 것을 볼 때, 이 본문에서는 오랜 시일에 걸쳐 공동체에서 주님의 성찬을 거행하는 가운데 일정한 틀을 갖춘 전승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바오로의 전승은 특히 루카 22,19-20의 전승과 매우 가깝다. 24절 “여러분은 위하는”이라는 문구에는 예수님의 죽음이 대속죄 제사적 죽음 또는 대리적 죽음이라는 동기가 함축되어 있다. 이 이른바 “반복령”은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서의 최후만찬 전승에는 없고 루카 복음서에 한 번, 바오로에게 두 번 나온다. 25절 “계약”앞에 “새로운”이라는 형용사가 붙어 있는데, 이는 루카 22.20과 여기 25절에만 나오며 예레 31,21-34의 유명한 예언을 상기시킨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이 장차 때가 되면 당신 백성을 “기억하실 것이며” 당신 백성과 “새로운 계약”을 맺으실 텐데 이 계약은 돌판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지는 계약”으로서 이 계약을 맺음으로써 백성의 죄가 사해지고 백성은 새로운 계약 관계에 있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바오로는 이 예언이 그리스도께서 수난하고 죽고 부활하심으로써 성취되었다고 본다. 26절 26절부터는 전승 부분이 아니다. 전승에 설명을 덧붙이면서 고린토 신자들이 “주님의 성찬” 때 잊고 있는 “주님의 죽음심”의 의미를 일깨운다. 26절에 나오는 “전하다”의 동사 형태는 명령법일 수도 있고 직설법일 수도 있으나, 이 문장이 앞 문장의 이유를 대는 접속사로 시작하므로 직설법으로 보아야겠다. 복음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4 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말하며 간곡히 청하였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9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감탄하시며, 주해 백부장의 종을 낫게 하시다 어록은 글자 그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집성한 문헌이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치유이적사화 한편, 구마이적사화 한 편을 내포하고 있었다. 루카와 마태오는 백부장의 종을 낫게 하신 이야기를 어록에서 옮겨쓰면서 제각기 많은 손질을 했다. 두드러진 차이점을 지적하면 마태오에서는 백부장이 직접 예수님을 찾아가는 데 반하여 루카에서는 유다인들의 원로들과 친구들을 예수께 보낸다. 그리고 마태오는 8,11-12를 다른 곳에서 옮겨와 이 이적사화에 삽입했다. 그러나 이적사화의 핵심만은 같다. 루카와 마태오 둘 다 이방인인 백부장을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본다. 그러니까 어록작가가 속한 교회에는 이방계 신도들이 있었다 하겠다. 백부장의 종을 낫게 하신 치유이적사화의 변체가 요한 4,46-54에 있는데 이야기가 퍽 다르다. 예수님이 가나에 계시는데 헤로데 안티파스의 신하 하나가 찾아와서는, 가파르나움에서 앓고 있는 자기 아들을 낫게 해주십사고 청했다 한다. 2절 백부장은 군졸 백 명을 거느린 로마군 장교. 이 사람은 고르넬리오 백부장처럼 유다교에 매우 호의적이다(5절). 10절 예수께서 멀리서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셨다. 또 한가지 원거리 치유이적이 마르 7,24-30에 전해온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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