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5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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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9-14 | 조회수470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함께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날이다. 자식의 아픔은 어머니에게 더 크게 다가오는 법이다. 시메온은 성모님의 고통을 이렇게 예언하였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고 기억하는 신심은 오래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으며, 1688년 인노첸시오 11세 교황이 이 기념일을 정하였다. 1908년 비오 10세 교황은 이 기념일을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인 9월 15일로 옮겨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연계하여 기억하게 하였다. 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순종을 배우셨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주해 7절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이 구절은 언뜻 보면 게쎄마니 장면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어휘는 오히려 탄원 시편(시편 116정 등)에 가깝다. 이러한 배경들을 참고하면서 볼 때,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활을 하시는 동안 사람으로서 온갖 고통과 번민을 겪으셨지만 그러한 어려움 중에도 하느님께 순종하셨기 때문에 하느님은 그분의 간구와 기도를 들어주셨음을 증언한다. 직역하면 “육의 날”, 그리스도는 연약한 사람으로서 지상 생활을 하셨다. “경외심”은 존경심에서 우러나는 두려움이다. 8절 고난을 통해 복종을 배운다는 가르침은 칠십인역의 지혜문학 성서에 가끔 발견되는 사상이다. 필로의 저서에서는 “고난을 겪다”와 “배우다”가 마주 함께 쓰일 뿐 아니라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그분의 절대적 순종의 결과이자 천상 영광의 바탕으로 믿고 고백했다. 9절 “완전하게 되다”는 “축성되다”의 뜻도 포함한다. 여기서는 두 의미를 다 내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부께 순종하여 자신을 바침으로써 주님이자 영원한 대제관이 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순종과 헌신을 통해 완전하게 되고 인간 구원의 원천이 되셨다. 사람들은 이 그리스도로부터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방법도 배운다. 그리스도께서는 수난과 복종의 결과 완전하게 되시고 구원의 원천이 되셨으며, 동시에 대제관으로 임명되셨다. 이 셋은 서로 다르면서도 밀접히 연결되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이 항목의 주제는 대제관이다. 이들 “완전함”, “구원”, “멜기세덱”에 관해서는 7.1-10.39에서 다시 설명한다. 10절 “임명되다”는 왕의 대관식이나 대제관 축성식과 같이 장엄하게 임명되고 선포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복음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 저미는 아픔 속에 하염없이 우시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부속가).> 주해 25절 네 군인과 대조하여 네 여인이 의도적으로 서술된 듯하다. 군인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감시하는 반면에, 여인들은 참고 기다리면서 지켜보는 모습이다. “그분 어머니의 자매”는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 살로메를 가리키는 듯하다. 26절 여기서는 충실한 제자로서 또한 십자가사건의 목격증인으로서 시사된다. 27절 십자가상 예수가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시던 제자”(애제자)에게 말한 이 두 마디는 간곡한 당부의 특성을 지닌다. 표면상 우선 죽어가는 아들로서 어머니에 대한 걱정이 시사된다. 즉, “애제자”는 지상 아들 예수를 대신하고 마리아는 그 제자의 어머니 관계를 가지도록 예수는 마리아와 “애제자”의 일치를 원하고 당부한다. 하지만 요한복음 전체 맥락에서 보면, 예수의 이 원의와 당부는 더 깊고 구체적인 의미를 시사한다. “부인”이란 호칭은 가나 혼인잔치에서도 보았듯이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의 독특한 관계를 신학적으로 뜻한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마리아는 예수로부터 오는 구원을 찾고 기다리며 또한 다른 사람들을 대신하여 예수의 선물을 청하는 자상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마리아에게 예수는 포도주를 선물함으로써 마리아의 청이 이루어졌다. 이 사건을 저자는 “표징”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마리아의 청이 혼인잔치에서 표징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이제 그 청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시사된다. 즉, 마리아는 예수 자신의 “애제자”를 아들로 맞아들여 함께 머물고, 그 아들은 어머니의 청을 중재하고 예수가 남긴 것을 계속 드러낼 보일 것이다. 예수로 인해 맺어진 이 모자관계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예수와 그 공동체가 비롯된 어머니의 품안을 상기시키려는 의도가 있을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인은 마리아 안에서 메시아적 구원을 기다리는 자라는 뜻이 시사된다. 마리아가 구원을 찾는 자들을 대표한다는 관점은 “애제자”의 역할로 인해 더욱 강조된다. 그 제자는 예수의 내적인 것을 직접 들을 수 있을 만큼 신뢰받은 제자요 예수의 계시를 설명하도록 부름받은 신앙인이며 동시에 믿음으로 깨달은 자다. 곧 인간을 위한 예수의 자기계시와 구원계시, 곧 예수의 복음을 중재하고 설명하는 제자다. 따라서 “애제자”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어머니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마리아로 하여금 어머니 역할을 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맥락 가운데 “애제자”가 주께서 오실 때까지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말도 유의해 볼 만하다. 그러므로 십자가상 예수의 이 말은 자기계시의 내용이 널리 지속적으로 전파되어 결실을 맺도록 바라고 돌본다는 의사표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애제자”는 구원의 문을 연 마리아와 함께 그 증인으로 언급된다. 예수가 지상에서 아버지께로 가는 “시간”을 가리킨다. 직역하면 “그 제자는 그분을 자기 것들 안으로 받아들였다”. 단순히 “집”을 가리키기보다 정신적 의미로 “소유”를 뜻한다. 그 제자는 예수의 어머니를 영적 공간 안으로 맞아들였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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