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7 연중 제24주간 토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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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9-16 | 조회수595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42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47 첫 인간은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입니다. 주해 35절 35-49절에서는 죽은 이들의 부활 방식에 관해 논한다. 35절의 질문은 이 단락의 주제를 제시한다. 제기된 질문에 답하기 위해 42절이전에는 예들이 제시되는데, 36-38절에서는 파종의 비유로 모습의 변화가 강조되며, 이에 39-41절에서는 동사가 거의 사용되지 않고 목록처럼 여러 가지 “몸”또는 “살”이 열거되면서 그 다양성이 강조된다. 36절 “살려지지 않습니다”라는 수동형이 어색하지만 하느님의 능력에 의한 부활을 강조한다. 37절 직역하면 “벌거벗은 곡식”, “벌거벗은”이라는 수식어는 바로 앞에 나오는 “새싹이 나오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는 씨앗”이라는 내용의 말에서 “죽어야 하는”에 해당하고 아래 53-54절에서 더 해설된다. 사실 1고린 5.3에서는 “벌거벗은”을 죽음을 표상하는 말로 사용한다. 42절 이 연속적 대조는 모두 이 단락 첫 구절의 “썩을 것으로 씨뿌려지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일으켜집니다”라는 말에도 표현되어 있듯이 부활한 후의 몸이 죽을 때의 몸과 얼마나 다른지를 강조한다. 썩지 않는, 영광스러운, 강한, 영적인, 천상에 속한몸. 그런데 부활한 몸과 죽을 때 몸의 차이는 “죽음과 썩음을 사이에 둔” 차이다. 이 차이는 “비존재에서 존재로 불러내시며”,“예수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세우신 분”, 즉 “부활시킬 수 있는 분”의 권능만이 메울 수 있는 차이다. 44절 원어는 프쉬키콘. 44절과 46절에서 세 번이나 “영적”과 되는데, 여기서는 “자연적” 또는 “지성적”이라는 뜻이다. 이미 2.14와 그 문맥에서도 이 형용사가 “영적”이라는 형용사와 대조적으로 사용되었다. 그곳에서는 “자연적 인간”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지혜를 깨달을 수 없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영의 힘을 받아야 깨달을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이와 비슷하게 여기서도 죽은 이들은 “자연적 몸”으로는 부활할 수 없고 “자연적 몸”이 “생명을 주는 영”을 받아 “영적 몸”으로 되어 부활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바오로는 바로 그리스도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으므로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 45절 “자연적 생명체”를 직역하면 “살아 있는 프쉬케” 또는 간단히 “살아 있는 혼”, “살아 있는 존재”. 이 표현은 창세 1장에서 사람뿐 아니라 짐승들에게도 적용된다. 바오로는 프쉬케를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는데, 하나는 히브리어 네페쉬에 해당하는 뜻으로 생명(목숨)을 뜻하거나 해당하는 사람 자신을 뜻한다. 다른 한편, 바오로는 프쉬케를 여기 45절에서처럼 “생명을 주는 원리”라고 볼 수 있는 “영”에 대조시켜 “사멸할 생명(체)”의 의미로도 드물게 사용한다. “마지막 아담”, 즉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다”는 그리스도론적 언표다. 바오로에게서도 “영”과 “생명”은 긴밀이 연관되어 있다. 49절 원어는 에이콘. “상,모습,모사” 등을 의미한다. 복음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8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서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11 그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주해 씨뿌리는 사람 비유 4.31-6.19에서는 주로 마르코를 따랐고,8.20-8.3에서는 어록과 특수사료를 따랐다. 그리고 8.4-9.50에서는 다시 마르코를 따른다. 루카는 마르 5,1-9의 씨뿌리는 사람 비유를 옮겨쓰면서 몇 곳을 간결하게 고쳤다. 5절 “밟히기도 하고”는 루카의 가필. 6절 “습기가 없어 말라 버렸습니다”는 마르 4,5-6의 “흙이 깊지 않아서 (싹이) 곧 돋기는 했지만 해가 솟자 타 버렸습니다. 뿌리가 없어 말라 버렸던 것입니다”를 줄인 것이다. 7절 마르 4.7에는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라는 말을 덧붙였는데 루카는 그것을 삭제했다. 8절 마르 4.8에선 단계적으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를 꼽는데 루카는 가장 큰 수확만 꼽아 “백 배”라 한다.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루카는 마르 4,10-12를 옮겨쓰면서 약간 손질했다. 10절 마르 4.10에서는 “비유들에 관해서 물었다”고 하는데 루카는 복수를 단수로 고쳤다. 그리하여 비유 전반에 관한 물음을 씨뿌리는 사람 비유 하나에 관한 물음으로 바꾸었다. 마르 4.11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내려 주셨다”하는데, 여기 10절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들을 알아듣게 해주셨다” 한다. 씨뿌리는 사람 비유의 풀이 예수 친히 비유를 이렇게 풀이하신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가 비유해설 형태를 빌려 전도와 사목 체험을 진술한 것이다. 13절 마르 4.17에서는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이라 하는데, 루카는 박해를 일반화하여 “시련의 때가 되면”이라고 고쳤다. 15절 마르 4,20에서는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서”라 하는데 루카는 “말씀을 듣고 지켜서 참고 견디는 가운데”라고 고쳤다. 여기 “참고 견디는 가운데”는 직역하면 “인내안에”로서 같은 표현이 네 복음서를 통틀어 오직 루카 21.19에 한 번 더 나온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미사때에 독서를 하시는 분들은 말씀을 선포하듯이 해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하고 외치셨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미사시에 독서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선포하듯이 하려고 독서를 하고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신부님께서 “예. 선포하듯이니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아주 잘하셨어요.”하면서 칭찬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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