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5 연중 제26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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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9-24 | 조회수952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이제 흥청거림도 끝장나고 말리라.> -. 아모스 예언자는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을 아람곳하지 않는 자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리라고 한다. 제2독서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계명을 지키십시오.>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주해 11절 “하느님의 사람”이란 구약성서에서는 모세 또는 예언자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고 여기서는 안수를 통해 하느님의 영을 받은 교직자들을 가리킨다. 2디모 2,22; 3,16에서와같이 철저히 하라는 말이다. 신앙생활을 마치 교직생활을 철저히 하라는 말이다. 12절 이 고백을 세 가지 경우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세례 때의 고백, 교직 수여식 때의 고백,박해 때의 고백이다. 세례식에서 세례를 받는 자와 교직 수여식에서 교직을 받는 자는 신앙고백문을 신도들이 증인으로서 지켜 보는 가운데 엄숙히 봉송했다. 박해 때는 특히 교직자들이 박해자들을 앞에서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12절의 고백은 박해때의 고백인 듯하다. 빌라도 앞에서의 그리스도 증언을 상기시키는 말이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14절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란 말은 예수의 재림이 가까이 다가온 것으로 보는 것 같지만 다음 15절의 “정해진 때”란 말이 이것을 상대화시킨다. 어쨌든 그 시기는 알 수 없으니 현재 충실히 살아야 한다. “이 계명”이란 신앙고백에 따른 의무다. 15절 “정해진 떼”라고 말한 것은 구원에 관한 모든 사건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이것을 보여주실 분”이란 새말에 그리스도를 나타내어 보여주실 하느님을 가리킨다. 15-16절은 본디 유다교에서 유래한 대영광송인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대영광송을 유다인들과 같은 관점에서 알아들을 수는 없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가까이할 수 없는” 하느님. “어느 인간도 보지 못한 ”하느님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복음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주해 19절 부자와 라자로 예화 이 예화는 루카복음에만 수록되어 있다. 그 짜임새를 보면 전반부는 부자와 빈자의 처지가 저승에서는 완전히 뒤바뀐다는 이야기이고, 후반부는 살아 생전에 모세와 예언자들의 가름침대로 회개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전반부 예화와 이야기가 이집트 문헌에도 있고 예루살렘 탈무드에도 있는데 이 두 문헌에는 상선벌악. 인과응보 사상이 한결 더 강하게 드러난다. 전반부 예화는 본디 이집트에서 싹터 유다교로 건너가고, 다시 유다교에서부터 예수님과 초대교회를 거처 루카에게 이르렀다 하겠다. 신약성서에서는 역사의 종말에 있을 구원과 멸망을 자주 언급한 한편, 개개인의 사후 운명에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루카는 명계에 관한 말을 한다. 우선 우리 예화에서는 라자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으로”, 부자는 죽어서 “지옥으로”갔다 한다. 또한 예수께서 당신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된 죄수더러 “진실히 당신에게 이르거니와, 당신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입니다”라고 약속하셨다 한다. 그러나 루카는 명계(冥界)를 행복한 곳 또는 불행한 곳으로 상상했다. 이처럼 루카가 명계를 공간적으로 표상한 것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바오로는 위격적으로 표상했는데, 이는 훨씬 깊이있는 내세관이다. 바오로는 자신이 죽으면 “주님께로 들아간다”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도 했던 것이다. 20절 예수의 비유나 예화 가운데 여기만 고유인명이 나온다. “라자로”는 히브리어 엘레아자르(하느님이 도우시다)의 음역인데, 하느님이 빈자를 도우셨다는 예화의 내용 때문에 빈자의 이름을 “라자로”라 했을 것이다. 21절 파피루스 75호, 시나이,바티칸 사본에서는 “떨어지는 것들로”, 알렉산드리아. 베자 사본에서는 “떨어지는 부스러기들로”라 한다. 27절 후반부에는 부자가 자신은 기왕 버린 몸이지만 세 형제들이나마 죽기 전에 회개하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라자로의 부활 같은 엄청난 기적을 보면 형제들이 회개할 가망이 있다 한다. 그러나 회개를 촉구하는 성경 말씀도 듣지 않으니 죽은 사람이 부활할지라도 소용없다고 아브라함은 답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국가가 생기기전에 민족이 먼저 있었다. 우리들은 모두가 이주민들이다. 우리나라도 몽골로부터 이주하기 시작하여 한반도로 이주하여 살았다고 한다. 그럼 민족을 생각해 보자. 특히나 미국은 지금의 대륙에 살기전에 본토지에 살고 있던 인디언이란 민족들과 치열한 전쟁을 하여 지금의 미국이 생겨났다는 것은 다들 잘 알고 있다. 그리 먼 얘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는 러시아이다. 현시대의 학자들은 자신의 나라가 먼저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사람의 뼈가 언제 시대의 것이니 하면서 오래전에 있었던 이들이라고 말들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 멀지 않은 시대에는 국가간의 전쟁으로 인하여 난민들이 생겨났고 직업따라 돈을 벌기위하여 다른 나라에 살기도 한다. 아담과 하와의 죄가 없었다면 우리들은 에덴동산에서 살았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민족보다 국가의 테두리를 보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한 국가의 테두리안에서 보더라도 거주이전의 자유가 있지만 전세방을 긍긍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기에 어느 지역으로 가서 사느냐는 이민자들이 넘쳐난다. 우리는 성서에서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이주를 생각해 봐야 하고 요셉때에는 이집트로 이주하여 살았던 것을 눈여겨 봐야한다.모세 또한 당연하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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