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8 연중 제26주간 수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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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9-27 | 조회수1,164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찌 의롭다 하겠는가?> 욥기의 말씀입니다. 9,1-12.14-16 11 그분께서 내 앞을 지나가셔도 나는 보지 못하고 -. 욥은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어찌 의롭다 하며 누가 그분과 겨루겠냐고 한다. 복음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59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예수를 따르려면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 9,57.62에도 소명과 추종에 관한 상황어 세 편이 수록되어 있다. 첫째와 둘째 상황어는 마태오에도 있는데, 이 둘은 어록에서 옮긴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셋째 상황어는 마태오에 없다. 루카는 이 상황어를 구전에서 채집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어록에서 따왔을 개연성이 더 크다. 그 까닭인즉 마지막 상황어와 첫째 상황어의 구조가 똑같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추종을 자청하는 무명 인물에게 철저한 요구를 하신다. 끝으로 마르코복음과 어록의 소명사화 사이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차이점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마르코 복음에는 소명을 받은 사람의 이름과 신분, 소명을 받은 장소와 시기, 소명에 대한 추종 여부가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어록에는 어떤 요소들이 없고 예수님을 따르려면 일체의 안일을 떨쳐버려야 한다는 요구만이 있다. 57절 첫째 상황어에서는 이스라엘 각지를 정처없이 떠돌아다니시던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에게 같은 생활을 요구하신다. 우리나라 방랑시인 김립도 58절과 흡사한 말로 신세를 한탄한 적이 있다 한다. “새는 보금자리에, 짐승은 굴에 모두 다 거처할 데가 있으되, 나는 돌아보매 한평생 홀로 슬퍼하고 있도다. 59절 당대 유다인들이 장례를 무척 중요시한 사실을 보면 둘째 상황어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이례적인지 분명히 드러난다. 자기 앞에 시신을 모신 때에는 셔마를 외우는 일과 기도와 기타 기도들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 후대에는 여기에다 “율법에 명시된 모든 명령을 지키지 않아도된다”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유다교 일각에서는 장례를 선행의 극치로 여겼다. 남달리 정결례를 지켜야 했던 까닭에 원칙적으로 문상 가는 일이 없던 제관들조차 자기 부모. 동기. 자식의 장례만은 손수 치러야 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이 우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라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 옛날 하느님이 예언자들에게 사회규범을 파기하도록 명하신 고사를 연상케 한다. 하느님이, 상처한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곡하지도 말고 상례를 갖추지도 말라고 하셨는가 하면, 예레미야 예언자들에게는 결혼하지도 말고 향연에 참석하지도 말라고 하셨다. 60절 “당신은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시오”라는 말씀에는 예수께서 인륜 대사인 부친 장례까지 금하신 이유가 드러난다. 그보다 더 고차원적 가치인 하느님의 나라를 선전하는 일이 시급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하느님의 나라의 충격을 받아 결혼하지 않거나 결혼생활을 지속하지 않는다고 하신 단절어를 연상케 된다: “하늘나라 때문에 자신을 고자로 만든 고자들도 있습니다”(마태 19.12). 62절 셋째 상황어에서는 예수께서 추종자에게 식구들과 작별할 겨를조차 주시지 않는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제자로 삼은 고사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엘리야가 밭을 갈고 있는 엘리사를 제자로 삼으려 하자 엘리사는 “부모님께 작별인사를 한 다음에 따라가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하니 엘리야는 기꺼이 “어서 가보게. 내가 어찌 작별인사를 금하겠는가”라고 허락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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