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3 연중 제27주간 월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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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10-02 | 조회수433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제1독서 <복음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9 우리가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이제 내가 다시 한번 말합니다. 10 내가 지금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1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분명히 밝혀 둡니다. 주해 6절 경고 – 다른 복음이란 없다 바오로 서간의 일반적 양식에 따르면 여기는 감사의 내용이 올 자리이지만, 갈라디아서에서는 갈라디아인들의 변덕스러움에 대한 놀라움과 충격으로 대치된다. 여기서 서간을 작성한 동기가 나타나며, 이미 본격적 논쟁이 개시되는 셈이다. 바오로에게는 흔히 하느님이 부르심의 주제이시므로, 여기서도 하느님을 지칭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개연성이 적다. “그토록 빨리”란 갈라디아 교회가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말이라기보다는 바오로 자신이 전한 복음에 등돌리려는 갈라디아인들에 대한 그의 놀라움이 수사학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7절 원문에서 6절에는 알로가, 여기서는 헤테론이 사용되었다. 보통 전자는 “여럿 중의 하나” 혹은 “같은 종류의 다른 것”을, 후자는 “둘 중의 하나” 혹은 “다른 종류”를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 특별한 의미 차이를 두려고 한 것 같지는 않다. “다른 복음” 혹은 “또 하나의 복음”이란 이미 복음이 아니므로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복음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능력”이며, 그리스도는 갈라진 분이 아니므로 오직 하나인 복음이 있을 뿐이다. 바오로의 적대자들 역시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쳤음이 암시되어 있다. “혼란시키는” 혹은 “원하는”이라는 현재형 분사는 그리스어 문법상 과거부터 지속되어온 일임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그리스도가 복음의 내용이요 복음이 그분의 말씀임을 뜻한다. 바오로의 적대자들로서 갈라디아 교회에서 유다주의를 선동하는 자들 8절 8,9절에 두 번 저주가 선포되는데, 그 조건이 8절에서는 가정법을 사용하여 미래의 불확실한 사실로, 9절에서는 직설법을 써서 현재의 구체적 상황으로 묘사된다. 바오로는 이 서간을 쓰기 전에 이미 복음을 왜곡할 위험에 대해 경고했거니와, 이제 실제 상황에 마주쳐 더욱 엄하게 저주를 선포한다. 모세가 천사들로부터 율법을 받았다는 유다교 믿음을 염두에 둔 말이다. 천사라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선포한다면 거기에 귀기울여서는 안되며, 그 천사마저 저주의 대상이 되리라는 말이다. “저주”는 원래 “신전 봉헌물”을 의미했는데, 후대에 특히 칠십인역의 영향으로 “저주의 대상”, “하느님의 진노에 넘겨진 것”을 지칭하기에 이르렀다. 바오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한다. 10절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고” 혹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의 의미다. 바오로가 개종자를 많이 얻기 위해 율법을 완화했다는 적대자들의 암시적 비난을 수사학적으로 반박한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다”란 그 자체로 부정적 문장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것”과 양립할 수 없다는 부정적 맥락에서 사용되며, 따라서 비위를 맞추고 환심을 사려는 아첨행위를 가리킨다. 바오로는 “아직도”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한때 자신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했음을 밝히는데, 아마도 바리사이다운 열정으로 교회를 핍박했던 일을 지칭할 것이다. 회개를 통해 모세의 율법인 “종살이의 멍에”에서 벗어나 이제는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된 바오로는 “종”으로 지칭하는데 이는 바오로가 사도직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밝혀주는 단서가 된다. 사도로서 바오로의 자세는 종의 모든 의존 상태. 종의 충성심.복종심 등을 포함하여 구약에서 “하느님의 종”이라고 불리는 위대한 인물들의 자세와 상통한다. 11절 다음에 올 내용이 중요함을 암시하는 장엄한 도입구다. 독자들이 이미 그 내용을 듣고 잘 알았지만 더는 받아들이지 않거나 잊어버리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바오로 자신이 전한 복음은 그 기원이 인간적인 것 이상임을 주장한다. 12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서 속격은 목격적의 속격일 수도 있고 주격적 속격일 수도 있다. 이는 바오로가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을 지칭한다. 복음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주해 25절 25절(=마태 22,35)에서는 “율법학자 (하나)가 그분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마르 12.28에서는 “율사 하나가 ... 예수께서 그들에게 잘 대답하시는 것을 보고는 다가와서 예수께 물었다. 마르 12,28에서는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은 어느 것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물려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는 18.18의 물음과 똑같다. 루카는 영생을 얻는 조건으로 “행함”을 거듭 강조한다. 27절 마르코복음에서는 예수 친히 사랑의 이중계명을 말씀하시고 율사는 찬동하면서 그것을 반복한다. 28절 28절은 25절을 문체만 고쳐 되풀이한 것이다. 29절 29절은 사랑의 이중계명과 착한 사마리아 사람 예화를 잇대면서 루카가 덧붙인 연결문 “의로운 체하다” 동사는 네 복음서 가운데 여기말고 루카 16.15에만 있는데,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이렇게 책하셨다 한다. “여러분이 사람들 앞에서 의로운 체하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속을 알고 계십니다. 사실 사람들 가운데서 고상한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흉물입니다.” “의로운 체하다”동사와 매우 비슷한 표현이 18.9; 20.20에도 있다. 30절 본디 여기서부터 사마리아 사람 예화는 시작되었을 것이다. 사실 루카복음에만 수록된 예화나 비유 가운데는 “(어떤) 사람(들)”로 시작되는 것이 상당수에 달한다. 예루살렘에서 예리코까지는 약 25키로미터. 그 사이는 민가가 없는 사막인 까닭에 예로부터 자주 강도가 나타났다. 32절 “레위 사람”이란 예수 당시 제관 보조역으로서 제사때 제물을 준비하고 노래를 불렀다. 또한 십일조를 거두어들이고 성전을 경비하는 일도 했다. 제관과 레위 사람이 왜 강도를 만난 동족을 돌보지 않았는지 그 동기를 따질 필요가 없다.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돌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35절 데나리온은 로마 은화. 농촌의 하루 품삯 36절 예화는 본디 36절의 질문으로 끝맺었을 것이다. 질문에 대한 답변은 자명하다. 유다교 성직자들이 아니라 혼혈 이단자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유다인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이 예화로써 예수께서는 유다인 청중을 향해 저 사마리아 사람처럼 처신하라고 촉구하신다. 곧, 절실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면 민족적. 종교적 선입관 따위를 버리고 힘닿는 데까지 보살피라는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을 예로 든 이 예화야 말로 민족적, 종교적 우월감에 사로잡힌 유다인 청중에게는 큰 충격을 주고도 남았으리라. 현재의 문맥을 고려한다면, 누가 나의 이웃인가 따질 것이 아니라 내가 불행한 사람의 이웃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37절 37절은 25.28절을 염두에 두고 루카가 내린 결론이다. 영생을 물려받으려면 “행함”이 있어야 하는 법. 어떤 행함? 사랑의 이중계명을 행할 것이요, 저 사마리아 사람처럼 민족적, 종교적 선입관을 버리고 불행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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