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4 화요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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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10-03 | 조회수586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프란치스코 성인은 1182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아시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기사의 꿈을 안고 전투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된 그는 많은 보석금으로 석방되었다. 프란치스코는 다시 예전처럼 자유분방하게 살다가 중병에 걸렸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다가 회복한 그는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기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그에게 젊은이들이 모여들자 그들과 함께 프란치스코회(작은 형제회)를 설립하여 복음적 가난을 실천하였다. 프란치스코는 1224년 무렵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다섯 상처(오상)를 자신의 몸에 입었는데, 이러한 오상의 고통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226년에 선종한 그를 2년 뒤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시성하고,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20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이 글은 하느님 앞에서 말합니다만 주해 13절 회개하기 전에 바오로는 바리사이로서 모세 율법과 조상 전통에 반대되는 것을 열렬히 배척했다. 갈라디아인들이 이미 들어 아는 이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 바오로는 자기 과거 삶의 방식이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복음서에는 에클레시아(교회)라는 단어가 드물지만 바오로의 편지에서는 많이 발견된다. 칠십인역에서 이 용어는 히브리어 카할을 번역한 단어인데, 광야에서 방황하는 이스라엘의 회중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특히 하느님 백성의 제의적 모임을 지칭하기도 했다. 바오로에게 있어 “하느님의 교회”는 구약의 예배적 모임을 상징하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지칭할 뿐 아니라, 동시에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으로 하나가 된 유다인과 이방인들의 유대와 일치를 표현한다. 15절 칠십인역 표현으로서, 구약의 예언자나 “야훼의 종”(이사 49.1 참조)의 소명사화에 뿌리가 있다. 16절 인지나 이해를 뜻하는 동사와 함께 쓰이는 전치사 엔은 여격과 함께 단순히 간접목적어를 지칭할 수 있으며 이 경우에는 단순히 “나에게”로 번역된다. 다르게는 “나를 통하여”로도 번역될 수 있지만 다음에 오는 문장 때문에 중복처럼 보인다. 또한 일반적인 해석으로서 “내 안에”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 때는 바오로에게 주어진 계시의 결과로 얻어진 내적 이해와 변화를 강조하는 의미가 된다. 바오로는 자신의 사도직을 그리스도의 계시와 연관시키지만 자신의 소명이 이미 모태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진술하므로, 사도직 위임과 계시가 시간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어쨌든 여기서는 자신의 회개 사건보다는 소명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기꺼이 작정하시다”라는 표현은 하느님이 절대적 자유의지로써 바오로를 부르셨음을 강조한다. “어떤 사람”은 직역하면 “살과 피”. 1고린 15.50에도 나오는 표현으로서, 덧없는 혹은 약한 피조물인 “인간”을 뜻한다. 17절 바오로는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의 소명과 권위를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한편 자신을 그들과 동일한 차원에 놓는다. 바오로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자기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에게서 복음을 받은 것이 아님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아라비아”는 아마도 아레다 4세 필로파트리스가 다스리던 나바테아 왕국을 지칭할 것이다. 분명히 밝혀지는 않지만 그가 아라비아로 간 것은 선교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라비아에서의 그의 활동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으며, 사도행전에는 그가 아라비아에 갔다가 다마스커스로 돌아왔다는 이야기 자체가 없다. 18절 바오로 사도의 연대기를 추정하는 데 중요한 진술이지만, 어느 시점부터 3년 후인지 분명치 않다. 가능성은 두 가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나고부터 아니면 다마스커스로 돌아오고부터 3년 후다. 그리스어 부정법 히스토레사이의 의미에 대해 논란이 있어 왔다. 직역하면 “문의하다. 조회하다”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와 라틴 주석가들은 “보다, 만나다”로 이해하여, 사교적 목적의 방문이라고 해석했다. 현대 학자 일부는 바오로가 게파로부터 예수의 가르침과 직무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방문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바오로가 자신의 복음이 사람에게서 기인한 것이 아님을 주장하는 맥락에 부합할 수 없다. 다른 학자들은 전통적 해석을 따라 게파를 개인적으로 알기 위한 목적의 첫 만남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 19절 고전 그리스어와 헬레니즘 그리스어에서 “형제”는 “피를 나눈 형제”를 의미한다. 하지만 칠십인역에서는 “친족”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도 같은 단어로 번역됨을 볼 수 있다. 이집트의 그리스어 파피루스에서도 이 단어는 “친척”이라는 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서도 “친척, 친족”이라는 의미에서 사용된 단어다. 19절의 문장상으로는 야고보가 사도들에 포함될 수도 있고 제외될 수도 있는데, 전자의 경우 바오로가 “사도”라는 명칭을 열두 사도에게뿐 아니라 폭넓게 사용한다는데 근거하면, 후자의 경우 야고보의 특별한 위치를 강조한다고 하겠다. 어쨌든 그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나, 열두 사도에 속하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는 다른 사람이다. 바오로는 그를 “주님의 형제”라고 부르는데, 에우세비우스에 의하면 그는 “예루살렘의 첫 번째 ”주교“로 알려져 있다. 20절 바오로는 자신의 복음이 인간에게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받은 것이며 예루살렘의 사도로부터 받은 것이 아님을 맹세 형식으로 주장한다. 적대자들의 비난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21절 ”시리아와 길리기아“는 바오로의 고향인 다르소를 포함할 텐데, 바오로는 여기서 몇 년간 머물렀으며, 선교 활동을 펼쳤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유다 교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복음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주해 마르타와 마리아 10, 38-42는 특수사료에서 옮긴 상황어. 예수님을 영접하는 데는 음식 대접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그분 말씀을 듣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38절 요한 11.1 에 의하면 두 자매는 예루살렘에서 요르단 강 쪽으로 3키로미터 떨어진 베다니아에 살았다 하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39절 예수님이 여자를 가르치신 것은 당대 유다교 관행을 거스른 것이다. 42절 예수님의 말씀 주제는 하느님의 나라. 그런데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여러분은 오히려 그분의 나라를 찾으시오. 그려면 여러분은 이런 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12.31=마태 6.33).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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