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2 연중 제28주간 수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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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10-11 | 조회수980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제1독서 <그리스도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욕정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22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주해 18절 현재 수동태로 쓰인 “영에 인도하다”는 실제적으로 16절의 “영을 따라 거닐다”와 동일한 뜻이다. 사람이 자신의 의지를 인도하는 영에 자발적으로 종속시킴을 의미한다. 이렇게 영의 인도를 따르는 사람은 “육”을 이기는 내적 원칙을 갖게 되고, 더는 율법의 형식적 규율에 구애받지 않으므로 “율법의 지배”에서 자유를 얻게 된다. 19절 “명백하다”는 육의 행실들이 공적으로 행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육의 행실들”임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 수 있다는 의미다. 21절 대표적인 15개 악습을 열거한다. 이런 악습목록은 유다교와 그리스의 윤리철학, 그리고 신약성서에서도 발견된다. “그밖에 비슷한 것들”이라는 말로 끝내어, 앞에 열거한 악습들이 대표적임을 가리킨다. 특정한 순서나 구조와 상관없이 악습들이 나열되는 듯하다. 물론 이 악습들을 몇 가지 범주로 묶으려는 사도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것이 세 가지 성적 범죄, 두 가지 이교도의 생활, 여덟가지 인간관계 갈등, 두 가지 술 취함과 그 결과로 나누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목록에는 “간음”과 “살인” 같은 주요한 항목이 빠져 있고, 목록을 나열하는 원칙을 찾기가 어렵다. 바오로가 임의로 수집한 용어를 한데 모으면서, 사람들 가운데서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악을 묘사한다고 보는 것이 나올 듯하다. 그리스어의 구문상 굳이 강조한 위치라면 첫 자리, 즉 음행에 있다고 하겠다. “전에도 내가 말했듯이”는 아마도 바오로가 갈라디아인들과 함께 있을 때 가르쳤던 것을 염두에 둔 것 같다. 이런 가르침을 준 시기에 대해 정확히 언급하지는 않는다. 바오로가 가르쳤던 세례 전 교리교습으로서 윤리적 가르침의 한 부분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는 바오로에게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닌 “하느님 나라”라는 용어가 앞부분에서 아무런 언급도 없이 갑자기 등장한다는 것으로도 뒷받침된다. 바오로가 이것을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윤리적 가르침으로 준 것이라면, 이것은 초대 그리스도교 교리교습의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22절 “영의 열매”는 “육의 행실”에 대치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율법이나 육의 지시대로 살려는 인간의 노력과 대치되는, 자발적으로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가리킨다. 23절 어떤 학자들은 이 덕행목록도 일정하게 분류하려고 했다. 예컨대 베초는 악습목록이 악습의 특정인 무질서를 강조하기 위해 기준 없이 나열된 반면, 덕행복록은 의적 순서로 배열되었다고 주장한다. 마음 상태, 인간관계, 처신 원칙. 그러나 이런 분류를 본문자체에서 끌어낸다는 것은 너무 인위적이므로 무작위로 배열했다고 보는 것이 낫다. 여기서도 첫 자리에 놓인 “사랑”이 강조된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라”는 훈계를 상기시키려는 의도인 것 같다. 이러한 영의 열매를 거스르는 법을 제정할 필요가 없는데, 율법은 “범법 때문에 곁들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율법을 언급하는 것은 율법 위주의 도덕생활을 추구하는 갈라디아인들의 현 상황을 상기시키면서 그리스도인의 윤리규범은 율법이 아니라 영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24절 신앙과 세례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대해서만 죽은 것이 아니라 육자체와 그 세속적이고 타락한 경향들에 대해서도 죽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양식,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시는” 것이다. 25절 “영으로 산다”는 갈라디아서에서 처음 나오는 표현이지만 “영을 따라 거닐다”,“영에 인도되다”와 같은 의미다. “따라 걷다”라는 표현은 군사용어로서 “곧은 선 안에서 걷다, 대열에 속하다, 줄지어 서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나중에 “표준에 부합하다. 동의하다. 호응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교적 생활은 영으로 충만해서 연의 인도에 따라 행군하며 육의 욕망을 파괴하는 윤리적 처신을 뜻한다. 26절 자만하며 시비를 벌이고 질투하는 것은 영을 따라 살지 않고 육을 따라 사는 자들의 행실이다. 이는 인간관계나 공동체생활에 결정적 약점이 된다. 그래서 자기중심적 생활을 버리고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 책임을 다하라고 권고한다. 이 권고는 갈라이다인들이 실제로 공동체생활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음을 전제한다. 복음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45 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해 42절 율사들은 가꾸고 기른 동식물에 대해서는 십일조법을 엄격히 적용했으나 야생 동식물에 대해서는 법해석이 서로 달랐다. 여기 “운향”은 야생풀이다. 42절의 변체가 마태 23.23에 있다. “불행하도다, 너희 율사와 바리사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분의 일을 바치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율법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은 저버리니, 그런 것들도 저버려서는 안되지만 이런 것들도 실천해야 했을 것이다.” 43절 43절은 실은 율사들을 탓하신 말씀인데 그 병행문이 마태 23,5-7에 있다.: 그들은 잔치에서도 높은 자리 회당에서도 높은 좌석을 차지하는 것, “장터에서 인사받는 것과 사람들로부터 랍비라고 불리는 것을 즐깁니다‘” 또 다른 전승이 마르 12,38-40에 수록되어 있다. 44절 44절의 병행문이 마태 23,27-28에 있다. “불행하도다. 너희 율사와 바리사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겉으로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속에는 죽은 사람들의 뼈와 온갖 불결이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들과 같으니. 이처럼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의로운 것같이 보이지만 속에는 위선과 범법이 가득 차 있다.” 45절 “율법학자”는 율사. 예수시대 율사들은 대부분 바리사이파에 속했기 때문에, 예수께서 바리사이들을 통박한 것이 자기들을 통박한 것과 같다고 여겼다. 46절 46절의 병행문이 마태 23.4에 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들을 꾸려 사람들의 어깨에 지우고 자기들은 그것을 저희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다.” “힘겨운 짐”,“무거운 짐”은 율법의 무수한 세칙을 뜻한다. 곧, 법의 압제를 가리킨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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