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3 연중 제28주간 목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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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10-12 | 조회수555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8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 주해 1절 “성도들에게”: 로마 1.7;1고린 1.2; 2고린 1.1.; 필립 1.1에서처럼 수신자들을 “성도”라고 부른다. 여러 번 그렇게 부르는데, 이 호칭에는 “그리스도 신앙인”에 대한 저자의 근본적 이해가 나타난다. 그리스도 신앙인들이란 자유롭고도 효과적인 하느님 주도하심이 은혜로, 특히 그분 십자가 죽으심과 은혜로 속량받고 죄의 용서를 받은 상태에 성별된 사람들이다. 5.26을 보면 그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정화와 성화를 받았으므로 “거룩한 이들”이라고 불릴 수 있다. 직역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충실한 이들에게”, 그리스어 형용사 피스토스는 바오로 서간에서 일반적으로 “충실한”의 의미가 있다. 분명하게 “믿는 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곳은 갈라 3.9이다. 사목서간에서는 “충실한 이”라는 말이 “믿는 이”의 의미로 분명히 사용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는 이”라는 번역이 매우 어색해 보이지만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에페소서 저자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앙의 지위를 갖게된 사람이며 그분께 충실한 이다. 2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이라는 표현에 관해 1고린 1.3; 2고린 1.3; 2고린 1.3; 11.31; 로마 15.6 참조. 3절 2고린 1.3; 1베드 1.3 참조. 이 첫 문장은 14절까지 여겨지는 서두 찬양의 주제문이다. 3ㄴ절에 찬양의 이유로 제시된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하셨다”는 내용이 무엇인지는 이 서두 찬양을 끝까지 읽어봐야 알 수 있다. 그 축복의 내용인즉: 선택. 하느님의 아들이 됨, 죄의 용서와 속량, 신비의 계시, 성령의 날인 등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하느님의 축복이 “그리스도 안에서”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 점은 이 서두 찬양에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어구가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어구는 옥중서간들을 포함하여 바오로계 문헌에서 160회 이상 나오는데 에페소서에 비교적 자주, 특히 여기 서두 찬양에 집중적으로 나온다. 저자는 이 어구를 통해 1.3에서 말한,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하셨다”는 내용을 전개시킨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은 우리를 선택하셨고, 은혜를 베푸셨으며, 우리를 용서하셨고, 함께 일으켜 하늘에 앉히셨으며, 만물을 총괄하고자 하셨다. 수동태로 표현된 문장들도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상속자로 뽑혔고 날인을 받았고, 하느님과 가까워졌고, 선행을 하도록 지음받았으며, 속량함을 받았다. 이렇게 저자는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위하여 구원활동을 하셨고, 하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야말로 구원의 중개자시다. 4절 “우리”: 7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속량된 사람들을 의미한다. 5절 “아들이 되는 자녀”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본디 종교용어가 아니라 “법적 입양”을 뜻하는 세속 법률용어로서 칠십인역에서도 아직 모르던 단어인데, 신양성서에서는 바오로계 문헌에서만 사용된다. 바오로에게 있어 유다인뿐 아니라 이방인도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느님을 감히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하느님의 은혜로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사건의 중요한 결과다. “사랑으로”는 5절과 연결시켜 번역하는 것이 옳다. 하느님의 선택과 예정의 동기는 사랑이다. 여기 나오는 주제 “애정”은 항상 긍정적으로 하느님의 구원행위에 관계된다. 이 문장을 근거로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탓도 없이 멸망으로 예정되었다는 식의 결론을 끌어내서는 안된다. 이런 사변이 하느님의 풍요로운 사랑. 은혜. 호의에 대한 감사의 정으로 가득한 이 서두 찬양에 들어설 자리가 없다. 7절 특히 골로 1.14 참조. “속량” 또는 “구속”이라고 번역되는 아폴뤼트로시스의 본래 뜻은 속전을 받고 종이나 포로를 자유인으로 풀어주는 행위다. 이 단어는 이렇게 풀어주는 행위를 뜻하기도 하고, 이런 행위의 결과, 즉 “구속된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9절 “신비”: 유다 묵시문학에서 “신비들”은 천상에 이미 준비되어 있지만 감추어져 있다가 하느님이 정하신 종말에야 비로소 드어날 사건이나 상황들을 일컫는 데 비해, 에페소서에서는 하느님의 계획 안에 감추어져 있었으나 이제 교회를 통해 우주적 차원에서 드러나는 현실을 지칭한다. 에페소서에서는 유다 묵시문학에와 달리 “많은 신비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인 “그리스도의 신비”에 관해 말한다. 10절 “역사를 충만함으로 이끄시어”: 직역하면 “때들의 충만함의 실행으로”, 오이코노미아는 흔히 “경륜”이라고 번역되는데,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대해 말하는 여기 10절에서는 “실행”의 의미를 가진다. “때들의 충만함”이라는 표현은 “때의 충만함이 오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파견하셨다”라는 갈라 4.4.를 연상시킨다. 에페소서에서 “때들의 충만함”은 지상 시간들의 정점,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신비가 계시되고 실현되며 전개되는 그리스도의 때를 가리킨다. “총괄하다”로 번역된 동사 아나케팔라오사스타이가 케팔레(머리)보다 케팔라이온(요점 또는 요지)에서 파생되었다는 데는 학계에서 이견이 없다. 이 동사는 본디 연설을 마치면서 그 내용을 요약하는 수사적 용어였다. 많은 학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총괄한다”는 표현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의 파괴된 질서를 새롭게 회복시킨다”는 의미를 하는데, 에페소서 전체 맥락에서 볼 때 매우 의미깊은 해석이다. 물론 아나케팔 라이오사스타이 동사에서 케팔레(머리)라는 단어가 직접나올 수는 없지만, 저자는 머리를 연상하며 이 동사를 선택했을 개연성이 높다. 이 견해는 “하느님께서는 만물위에 그리스도를 머리로 주셨다”라는 22절에 의해 뒷받침받는다. 따라서 10절을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겠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총괄하시면서 만물의 파괴된 질서를 새롭게 회복시키신다”. 복음 <아벨의 피부터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예언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50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53 예수님께서 그 집을 나오시자, 주해 47절 47-48절의 병행문이 마태 23,29-32에 있다: “불행하도다. 너희 율사와 바리사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비를 꾸미면서 ‘우리가 우리 조상들 시대에 살았다면 조상들이 예언자들이 피를 흘리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그러니 너희는 예언자들을 죽인 자들의 후손임을 스스로 증언하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 조상들의 못된짓을 마저 채우려무나!” 이 단절어는 어록작가가 소속한 교회에서 만든 말일 것이다. 단절어의 뜻인즉,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자기네 조상에 의해 살해된 구약 예언자들의 무덤을 돌보는 체하나 실은 조상들의 짓거리를 본떠 예수님과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죽인다는 것이다. 49절 49-51절의 병행문이 마태 23,34-36에 있다. 루카는 어록을 비교적 충실히 옮겼고 마태오는 많이 고쳤다. 49-51절은 지혜의 말씀과 이에 찬동하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양분된다. 지혜의 말씀은 심판 예고인데, 지혜가 예언자들과 심부름꾼들을 파견한다. 그러나 그들은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한다: 그러니 박해하고 죽인 자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이렇게 세 부분으로 짜여 있다. 신명기 계통 문헌에서 예언자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서술할 때 도식으로 말한다. 같은 양식과 내용을 지닌 말씀이 13,34-35에도 있다. 지혜 말씀의 출처를 두고 여려 가지 설이 있다. 이스라엘 지혜문학을 인용한 것이라는 설도 있고 예수 친히 발설하셨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어록의 전승자 또는 작가가 만든 말이라는 설이 유력한다. 사실 어록 전승자나 작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멀리는 예언자들을 학대한데다 가까이는 요한 세례자와 예수님과 사도들을 박해한 까닭에 종말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리라. 사실 어록이 집필된 50~60년경에 유다인들 가운데 더러는 세례자나 예수님을 믿었지만 대다수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지혜문학에서는 흔히 지혜를 의인화하여 지혜가 말한다고 한다. “하느님의 지혜”를 “지혜로운 하느님”이라 고쳐읽으면 순탄하다. 어록 전승자나 작가는 분명히 지혜문학의 영향을 받아 이런 표현을 썼다. 원문의 아포스톨로이는 막연하게 “심부름꾼들”이라 번역할 수도 있고 또는 분명하게 예수사건을 전하는 “사도들”이라 번역할 수도 있다. 51절 구약의 피살자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사례 두 가지를 든다. 아벨은 인류의 첫 피살자요, 제관 겸 예언자인 즈가리야는 유다 임금 유아스의 지령으로 번제의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피살되었다. 52절 52절보다 그 벙행문 마태 23.13이 어록을 더 충실히 옮겼다. “불행하도다, 너희 율사와 바리사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를 잠가 버렸으니, 사실 너희가 들어가지 않을뿐더러 들어가려는 사람들마저 들어가도록 가만두지 않는구나.” “하늘나라”는 본디 하느님의 왕정을 뜻하는 정치적 개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공간적 개념이다. 하늘나라를 “잠그다” 동사와 하늘나라의 “열쇠”명사는 그 어간이 같다. 53절 루카는 머리말(37-38절)을 꾸민 것처럼 이제 맺음말(53-54절)도 꾸몇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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