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4 연중 제28주간 금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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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10-13 | 조회수616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두었고 여러분도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주해 11절 “몫을 받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신약성서에서 이곳에만 나오는데, 구약성서에서 제비뽑기와 관련된 단어로서, 능동태로는 “제비뽑기와 관련된 단어로서, 능동태로는 “제비뽑기를 하여 정하다”, 수동태로는 “제비뽑기로 선택되다”를 뜻한다. 여기서는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사하신 구원에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함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12절 13절에 갑자기 나오는 “여러분”에 착안하여 이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이해하고, 여기 12절의 “우리”를 유다인 그리스도인만 지칭한다고 보며,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이 주장은 우선 “일찍부터 희망을 걸다”라고 번역된 프로엘피제인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유다인들은 그리스도 전부터 오랫동안 메시아를 대망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3-14(서두 찬양)에서 11절까지의 “우리”는 줄곧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한다. 12절에서 갑자기 이 “우리”를 유다인 그리스도인에게만 한정시키는 것은 무리다. “희망하다”를 뜻하는 엘피제인의 목적어에 전치사 엔을 쓰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따라서 엔크리스토 전치사구는 서두 찬양의 다른 데서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프로엘피제인의 접두사 프로는 반드시 시간적으로 “미리”만 뜻하는 것은 아니며 “희망하다”를 강조한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 희망 자체가 미래에 대한 것이다. “희망을 건”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과거 행동의 결과가 현재까지 지속할 때 사용되는 완료형 분사다.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의 상태”를 갖게 된 그리스도인 일반에 적용하는 것이 옳다. 13절 서두 찬양에서 12절까지는 “우리”라고 하다가, 이제 “여러분”이라고 말한다. 이방인만 지칭한다기보다는 이방인과 유다인을 구별하지 않고 수신자 전체에게 직접 말을 건넨다고 보는 것이 옳다. 직역하면 “여러분의 구원의 복음”, 복음은 진리의 말씀으로서 그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구원으로 이끈다. 13절의 정동사는 “여러분은 날인받았습니다”. 그 앞의 두 분사문은 이 정동사를 준비하는데, 여기서 “성령의 날인”은 세례를 배경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복음을 듣고 ... 믿어서 ...”는 신앙을 갖기 시작한 때를 암시한다. 초대교회가 확신하던 “성령을 받음”이 여기서는 “성령의 날인”으로 표현된다. “성령을 받음”은 초대교회에서 세례와 흔히 관련되었다. 사도행전의 선교체험에 의하면 세례 때 하느님의 영을 받는다. “성령의 날인”은 성령이 도장을 찍듯이 믿는 이에게 어떤 자국을 남긴다기보다 믿는 이가 세례때 받은 성령 자신이 “그리스도 신앙인임”을 드러내는 표지라는 뜻이다. “약속의 성령”은 “약속된 성령”을 뜻한다. 여기서 “약속”은 감추어져 있다가 이제 게시되어 이방인들에게도 알려진 그리스도 신비와 관련이 있다. 3.6에 의하면 이방인들도 복음을 통해 함께 약속을 차지하게 되었다. 14절 아라본은 “보증금.착수금. 약조금”을 뜻하는 상업용어다. 바오로는 이미 2고린 1.22; 5.5에서 하느님이 “영의 보증을 우리 마음 안에 주셨다”고 말하고, 로마 8.23에서도 비슷하게 “영”을 미래의 완전한 구속을 위한 “맏물”이라 부른다. “성령은 우리가 상속할 재산의 보증”이라는 14절에 의하면 성령이야말로 신앙인이 지금 이미 부분적으로 누리는 구원과 미래의 완전한 구속을 내적으로 연결하는 보증 역할을 한다. 직역하면 “소유의 속량까지” 또는 “소유의 속량을 위하여”. 매우 어색한 표현이라 번역에 많은 문제점을 일으킨다. 여기서 “소유”라고 번역된 단어는 소유하는 행동인 “차지함”을 뜻할 수도 있고 그 결과인 “소유물. 재산”을 뜻할 수도 있다. 이 단어가 말라 3.17;1`베드 2.9에서 하느님 백성이 하느님의 “소유”라고 지칭될 때 사용된다는 사실을 근거로 적지않은 이들이 14절의 “소유”를 “하느님의 소유”라고 번역하여 하느님의 백성에 관한 말로 이해했다. 이에 따른다면 문제의 어구를 다음과 같이 풀어볼 수 있다. “(하느님의) 소유(인 하느님의 백성)이 (완전히) 구속될 때까지”. 이것은 의미깊은 해석임에는 틀림없으나 과장된 해석인 듯하다. 하느님의 백성을 “하느님의 소유”라고 보는 생각이 에페소서 다른 데서는 전혀 나오지 않는데도 “소유”라는 단어 하나만 가지고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무리다. 14절에서 말하는 구속은 하느님 백성 전체가 아니라 개별 신앙인의 완전한 구속이다. “소유”라는 단어가 1데살 5.9; 2데살 2.14에서 구원 또는 영광의 “획득”,“차지”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도 자연스럽게 “차지함”의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1,3-14요약: 5-7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이려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우리 죄를 용서하는 구속사건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는데, 8-절에서는 이 구속사건의 범세계적, 더 나아가 우주적 의미에 대해 말한다. 즉, 그리스도를 통한 역사적 구속사건은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 총괄하려는 하느님 지혜의 계획을 계시하는 사건이다. 하느님은 이 계획을 이미 세상 창조 전부터 가지셨지만 “시간들이 충만하게 될 때” 비로소 실행하고자 하셨다. 그리스도 신앙인 실존은 하느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한다. 이방인을 포함하여 모든 신앙인이 성령으로 날인받아 충만한 구속 유산의 보증을 가진 희망의 사람들이다. 복음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5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주해 1절 1ㄱ절의 상황묘사는 루카의 가필이고 1ㄴ절의 단절어는 루카가 마르 8,15(“주의하시오.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시오”)를 약간 수정한 것이다. 루카는 “헤로데의 누룩”을 빼고,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풀이하여 “위선”을 덧붙였다. “위선”은 11,39-52의 비행을 뜻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고백하라 12,2-12는 어록에서 옮긴 것이다. 어록작가는 여러 가지 단절어를 수집하여 이 단락을 엮었다. 2절 지금 숨은 행적은 장차 종말심판 때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단절어는 어록에뿐 아니라 마르 4.22에도 전해온다. 편집사적으로 볼 때 2절은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연결될 수도 있고 제자들의 복음선포와 연결될 수도 있다. 3절 제자들이 처음에는 자기들끼리 복음을 논하다가 나중에는 온 세상에 선포하리라는 단절어. 병행문 마태 10.27의 형태는 약간 다르다. “내가 어두운 데서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을 여러분은 밝은 데서 말하시오. 여러분은 귓속으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시오.” 4절 공관복음을 통틀어 예수께서 여기서만 제자들을 친구라 하신다. 요한복음에서는 라자로 또는 제자들을 친구라 하신다. 마태 26.50에서는 유다 이스가리옷을 친구라 하시나, 원문의 낱말이 다르다. 4-5절은 순교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훈계인데, 그 병행문 마태 10.28의 형태는 약간 다르다. “몸은 죽여도 목숨은 죽일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시오. 오히려 목숨도 몸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시오.” 이 훈계가 예수님 친히 하신 말씀이라면 생애 말기에 신변의 위험을 느끼셨을 때쯤 그렇게 말씀하셨으리라. 그러나 어록의 전승자들이 심한 박해를 겪는 신자들에게 내린 훈계일 가능성이 더 크다. 6절 로마 동전 아스는 로마 은화 데나리온의 16분의 1.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 6-7절에는 하느님이 하찮은 참새조차 그처럼 돌보시거든 하물며 소중한 제자들을 알뜰히 돌보시지 않을쏘냐는 대비논법이 엿보인다. 하느님이 까마귀들까지 먹여 주신다는 말씀과 상통하는 말씀이다. 병행문 마태 10,29-31의 형태는 좀 다르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아스에 팔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중에 한 마리도 여러분의 아버지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놓고 계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시오. 여러분은 그 많은 참새보다 귀합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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