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 연중 제29주간 목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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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10-19 | 조회수649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아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주해 수신 공동체를 위한 기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기를! 3,14-21은 신약성서의 가장 아름다운 기도문 가운데 하나다. 수신 공동체의 신앙인들의 성숙한 신앙을 갖기를 빈다. 신앙의 성숙은 삼위일체 차원에서 이루어지며,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해아릴 길없는 사랑을 깨닫고 사는 데 있다. 4-21절의 기도는 “그리스도의 신비”와 “그리스도의 가없는 풍요하심”에 대한 명상으로 초대한다. 14-15절 1절 참조. “족속”으로 번역된 파트리아는 부성(父性)이 아니라 “가족,부족,족속”등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어떤 구체적인 그룹이나 공동체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17절 “그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머무시는” 삶은 바로 앞에서 말한 “영을 통하여 가능하게 되며 튼튼하게 되는 그리스도인들의 내적인 삶”의 다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로마 8,8-10에서는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여기서 “사랑”이란 19절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이 선사하시고 성령에 의해 매개되는 사랑을 뜻한다. 그러나 이 사랑은 형제자매 사랑으로 전해진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안에서의 하느님 사랑”에 뿌리내리고 살 때 이웃 형제자매들도 “그리스도인답게” 사랑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실존이란 바로 이런 사랑에 바탕한 삶이다. 18절 “모든 성도들과 함께”: 18-19절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개인주의적 삶에서 생기지 않고, 다른 모든 신앙의 형제자매와 연결되어 있는 공동체 관계 곧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 저자는 이런 단어들을 열거함으로써 하느님의 지혜와 그분 길들의 접근할 수 없는 성격을 표현하는데, 이는 지혜문학저 방법이다. 이 네 차원의 주제가 명시되지 않지만, 문맥상 하느님이 계시하신 구원의 신비임을 알 수 있다. 18-19절은 넓게 해석하자면 1고린 2.9의 비슷한 내용이다.: “눈으로 본 적도 없고 귀로 들은 적도 없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떠오른 적도 없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해 주셨도다.” 19절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란 철학에서 말하는 “파악”이상의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것으로서 사랑의 체험을 통해 깨닫게 되는 인식을 말하며 모든 이성적 인식을 초월한다. 그렇다고 “이론적 지식”을 무시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런 지식의 한계를 말한다. 1,17-의 청원기도도 신앙생활에서 “올바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밝혀준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궁극적으로 드러난 자기희생의 사랑이다. 일부 중요한 사본에는 “하느님의 온갖 충만함이 충만해지도록”. 14-19절 청원기도에는 접속사 하나로 시작되는 목적절이 세 번 나오는데, 그 마지막이 이 19ㄴ절이다. 이 청원기도의 최종목표는 수신자들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함안으로 충만해져 가는” 것이다. 16-17절과 18-19절 목적절도 결국 “하느님의 온갖 충만함 안으로 충만해짐”이라는 최종목표를 지향한다. 온갖 영적 축복을 주시는 하느님은 신앙인들을 당신 충만함으로 채워주신다. “충만해지다”라는 수동태는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에 참여하는 것”이 “은혜로운 일”임을 표현한다. 골로 1.19; 2.9에 의하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함”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골로 2.10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충만함에 참여한다. 여기 에페 3,19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의 신비를 체득하게 됨으로써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충만함”에 받아들여진다. 20절 20-21절의 영광송으로 에페소서 제1부는 끝난다. 21절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일부 사본에는 “그리고”가 빠져 있다. 다른 영송들과 비교해 볼 때, “교회 안에서”가 삽입되었다는 인상을 주자. 여기서도 저자의 “교회”에 관한 특별한 관심이 드러난다. 이 구절에 의하면 교회는 하느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공간이다. 영광은 인간이 드림으로써 하느님이 가지시는 것이 아니라, 본디 하느님께 속한 것이므로 “영광이 있으시기를”보다는 “하느님께 영광이 있도다”라고 인정하고 찬미하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겠다. 독사는 다른 영송들에서 함께 사용되는 “권능, 권세, 위대하심, 위엄” 같은 단어들이 보여주듯이 하느님의 “위대하심.영화로움, 그분의 권능에 찬 구원활동”등을 종합하는 의미가 있다. 복음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주해 불을 지르러 왔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 단락은 대별하여 두 가지 단절어가 겹쳐 있는데, 첫째 것은 루카복음에만 있고 둘째 것은 마태 10,34-36에도 있다. 어록에는 루카복음에서처럼 둘다 한자리에 실려 있었을 것이다. 어록의 전승자나 작가는 49-50절과 51-53절에 같은 낱말들(“세상에”, “... 하러 오다”)이 있는 것을 보고서 두 단절어를 한곳에 모았다. 소위 연쇄어 연결이다. 49절 48-50절의 불과 세례 상징어는 그 전승과정과 뜻을 밝히기 매우 어렵다. 우선 예수 친히 이 상징어를 발설하셨는지, 일단 그러셨다 할지라도 한꺼번에 발설하셨는지, 판단하기 곤란하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각기 다른 상황에서 49-50절을 발설하셨는 가정 감히 그 뜻을 이렇게 풀이할 수 있겠다. 구약에서는 하느님의 말씀 또는 엘리야 예언자의 말을 “불”이라고 했다. 그처럼 예수께서도 당신의 하느님 나라 선포를 “불”이라고 하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49절의 뜻인즉, 당신은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러 오셨고 그 선포가 온 세상에 울려 퍼지기를 열망하신다는 것이다. 50절의 “내가 받을 세례”는 다가올 죽음을 뜻하리라.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예고하면서 “초조해”하신 셈인데 그분의 인간적인, 참으로 인간적인 모습이 완연하다. 51절 51-53절의 말씀은 어록을 옮긴 것이다. 비슷한 내용의 말씀이 마르 13.12에도 있다. 묵시문학계에서는 역사의 종말이 가까워올수록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크게는 우주에 이르기까지 크나큰 붕괴현상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그러니 여기 가정 분열은 종말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한 가지 전조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정이 분열된 것도, 제자들의 가정이 분열된 것도 종말 전조로 이해하셨을 것이다. 53절 53절은 미가 7.6을 자유로이 인용한 것.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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