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6 연중 제30주간 수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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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10-25 | 조회수500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것처럼 섬기십시오.> 6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주해 1절 “주님 안에서”는 일부 중요한 사본에는 이 말이 없다. 2절 왜 제4 계명을 “첫째 계명”이라고 일컬었을까? 두 가지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다. 그 하나는 다음에 말하는 약속이 주어진 첫째 계명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십계명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중요 계명을 다음에 나오는 인간 상호관계에 관한 계명 중 첫째라는 뜻이다. 3절 출애 20.12의 단축 인용. “야훼 너희 하느님께서 너에게 주실”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저자가 볼 때 가나안 땅에 대한 기대는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겠다. 4절 “자녀를 성나게 하는” 거친 교육방법과 “주님의 규율과 훈계로 하는” 교육방법이 대조되는 것으로 보아“주님의 규율과 훈계”는 온유함을 포함함이 분명하다. “주님의 ”라는 수식어는 여기서 말하는 자녀교육의 종교적 성격을 분명히 해준다. 주님이야말로 참 교육자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부모들은 주님의 “보조교사” 역할을 권고받는 셈이다. 5절 “두려워하고 떨며”; 1고린 2.3; 2고린 2.3; 2고린 7.15; 필립 2.12 참조. 직역하면 “육(肉)에 따른”. 9절 “사람 차별”이라고 번역된 프로소폴렘프시아는 직역하면 “얼굴을 받아들임”이다. 구약성서의 나사 파님(“얼굴을 들라”- 예컨대 왕을 알현하는 경우)에서 유래하는데, 흔히 “편애하다” 또는 “사람차별하다”의 뜻으로 사용된다. 여기 종과 주인관계 권고를 보면 당대 노예제도를 뛰어넘는 외형적 변화를 가족 내에서 시도하지는 않는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라는가 그리스도인은 모두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어 서로 한 몸을 이룬다는 의식이 단기적으로는 아직 새로운 문화적, 사회적 모형을 만들어내지 못한 듯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앙이 인간간의 실제적 관계로 전환되기 때문에, 흔히 세상의 죄의 표지로 남아 있는 묵은 제도를 변혁시킬 수 있는 새로운 동기를 부여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노예를 책임있는 윤리행위 주체롤 보는 것 자체가 당대 사회에서는 전혀 새로운 태도이며, 세상 주인들에게 그들도 종들과 다름없이 “하늘에 주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은 놀랍게 새로운 점이다. 복음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2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27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주해 구원과 멸망 13,22-30가운데서 22-23절은 루카의 가필이며 그 나머지 24-29절은 어록에서 옮긴 것이고 마지막 30절은 마르 24-31을 약간 고친 것이다. 어록에서 옮겨쓴 24-29절이 마태오복음에는 7.13-14; 25,10-12; 7,22-23; 8,11-12에 흩어져 있다. 루카와 마태오 가운데 어느 쪽이 어록의 형태를 더 잘 보존했는지 속단할 수 없는 실정이다. 어록의 형태야 어쨌든 구전과정으로 거슬러올라가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상징어, 문을 닫아 버리는 집주인의 상징어,불의를 일삼는 자들은 버림받는다는 단절어, 하느님 나라 잔치에 관한 단절어는 다로따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이다. 22절 22절의 가필로 보는 까닭은 이렇다. 루카는 예수께서 상경중이라는 말을 자주 만들어 덧붙인다. “도시들과 마을들을”은 자역하면 “도시들과 마을들을 따라”인데, 같은 표현이 8.1(“도시와 마을을 따라)".9.6(“마을들을 따라”)에도 나온다. “지나가다”는 통과하다는 뜻으로서, 신약성서 가운데 로마 15.24를 제외하면 루카 6.1; 13.22; 18.36; 사도 16.4에만 나온다. 23절 23절도 가필일 것이다. 루카는 가끔 예수님의 훈계 앞에 질문을 덧봍인다. 문체를 살펴봐도 “그런데...하자”,“...향하여 말씀하셨다”는 루카의 문체임에 틀림없다. 묵시문학계에서는 종말에 구원될 사람들의 수효에 관심이 많았다. 24절 24절 상징어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지금 회개해야지 안 그러면 장차 회개하러 해도 시간의 여유가 없으리라는 뜻이겠다. 곧,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회개를 뜻하리라. 앞뒤 문맥을 참작하여 루카의 사상을 밝히면 이렇다. 예수께서는 종말에 구원받을 사람들의 수효에 관한 묵시문학적 질문을 일축하시고, 다가올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려 해도 못 들어갈 것이니 거기에 들어갈 수 있겠금 지금부터 노력하라고 촉구하신다. 그러니까 루카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신국 진입으로 이해했다. 병행문 마태 7,13-14는 마태오가 어록을 대폭 수정한 것이다. 25절 2절과 25절은 “문”이라는 연쇄어로 연결되었다. 25절의 상징어에서는 집주인이 한번 문을 닫아 버리면 밖에서 열어 달라고 두드려도 소용없다 한다. 그 뜻인즉, 하느님이 단죄하는 심판을 내리고 나면 구원을 받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25절과 매우 비슷한 말이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 비유 가운데 들어 있다.(마태 25,10-12). 26절 26-27절만 따로 보면, 여기 종말심판관은 분명히 예수님이시다. 이는 초대교회의 그리스도론을 반영한다. 사실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종말심판관으로 신봉했다. 그러므로 26-27절은 예수님의 발설이기보다 그리스도인들의 그리스도론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럼 종말심판관이신 예수님은 심판의 기준을 어디에다 두실까? 평소에 당신과 함께 식사하고 당신 가르침을 받은 사실에 따라, 곧 친분관계에 따라 심판하시지 않고, 정의 실천 여부에 따라 심판하신다, 따라서 불의를 일삼는 자들은 단죄받을 것이다. 마태 7,22-23에 병행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약간 다르다, 초대교회의 성령 운동가들이 “당신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당신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당신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지라도, 그들이 예수께서 새롭게 풀이해 주신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면 단죄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고 한다. 27ㄴ절(=맡애 7,23ㄴ)은 시편 6.9의 개작. 28절 28-29절에보다 마태 8,11-12에 어록의 단절어가 더 충실히 수록되어 있는 까닭에 이를 간략하게 풀이하겠다: 많은 사람들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들어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식탁에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의 아들들은 바깥 어둠속으로 쫓겨날 것이니 거기서는 울고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종말에 이방인들은 축복을 받고 유다인들은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인데, 이는 어록의 말씀 가운데서 이방인들에게는 가장 호의적이고 유다인들에게는 가장 자극적인 말씀이다. 이보다는 덜 강하지만 비슷한 내용의 말씀이 어록에 더러 있다. 백부장의 종을 낫게 하신 이적사화, 코라진과 베싸이다와 가파르나움에 대한 불행선언, 남방 여왕과 여왕의 니느웨 사람들에 관한 단절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관한 단절어를 예수님 친히 발설하셨든 어록의 전승자 또는 작가가 발설했든간에 그렇게 말한 이는 유다인들에게 실망한 나머지 이방인 전도에 주력했을 것이다. 30절 30절은 유행어. 루카는 마르 10.31을 조금 손질하여 옮겨실었을 것이다. 앞의 문맥에 따라 그 뜻을 풀이한다면, 이방인들 가운데도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유다인들 가운데도 거기서 쫓겨날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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