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 모든 성인 대축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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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10-31 | 조회수326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오늘은 하늘 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로,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특히 전례력에 축일이 별도로 지정되지 않은 성인들을 더 많이 기억하고 기리는 날이다. 동방 교회에서 먼저 시작된 이 축일은 609년 보니파시오 4세 교황 때부터 서방 교회에서도 지내게 되었다. 5월 13일에 지내던 이 축일을 9세기 중엽 11월 1일로 변경하였다. 교회는 이날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 뒤의 새로운 삶을 바라며 살아가도록 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준다. 또한 지상의 우리와 천국의 모든 성인 사이의 연대성도 깨우쳐 준다 제1독서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9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13 그때에 원로 가운데 하나가, 주해 7장 2절 구원은 동쪽에서 온다는 유다인들의 신념을 반영한 것 같다. 3절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에게 그 표를 해준다는 이야기다. 그 표를 받는 사람은 모든 시련에서 면제되는가? 그런 것은 아니다. 믿는 사람도 시련을 겪는다. 단지 그리스도 시련에서 이기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영광을 차지하게 한다는 것을 신자들에게 가리치신다, 그러므로 이 표란 하느님이 당신 종들에게 인간 능력의 한계를 넘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참아낼 수 있도록 어떤 초자연적인 힘을 주신다는 것을 뜻한다, 또 동시에 악인들이 받는 벌의 판결에서부터 보호되리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인장을 찍는다는 것은 소유물로 삼음을 상징한다. 하느님 종들의 이마에 찍는 표는 아마도 이 구절이 유래한 에제 9.4에서처럼 T(타우)자일 것이다. 4절 144,000은 상징적 숫자다. 이스라엘 12지파를 표시하는 12와 민족들과 연관하여 충만을 나타내는 12의 하느님 영역에 속하는 완전수 1,000이 결합된 숫자다. 셀 수 없이 많은 백성이 하느님의 구원을 얻을 것임을 상징적으로 표시한다. 선택된 사람들은 모두 이스라엘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어지는 현시(9-17절)에서 보여주듯이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의 언어에서 나온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구원받게 된다. 144,000명이라는 특수성과 무수한 무리라는 보편성의 대조는 단지 외형적인 것이다. “구원받은 집단”인 교회는 신약의 가르침에 의하면,“하느님의 이스라엘”(갈라 6.16),“아브라함의 자손”(갈라 3.29), “속으로 유다인”(로마 2.29)이다. 구원받은 공동체는 “남은 이스라엘”(이사 7.3;에제 11.13 참조)이라고 예언자들이 불렀던 사람들 외에도 메시아에 의해 정화된 사람들로 구성된다. 9절 이 표현은 쉽게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연상시킨다. 이 약속이 살아 있는 것으로 실현된다. 이제 참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교회이기 때문이다.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는 묵시록의 전형적 표현으로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1마카 13.51에 보면 “백칠십일년 이월 이십삼일에 유다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민족의 큰 적이 참패하여 이스라엘 땅 밖으로 쫓겨간 것을 축하했다”고 한다. 구약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다는 것은 승전의 기쁨을 표시한다. 이처럼 여기서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사람들은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하늘나라에 개선한 사람들임을 가리킨다. 14절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대박해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나, 예수께서 종말론적 담화에서 인용하신 다니 12,1의 “큰 환난”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것이다;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던 어려운 때가 올 것이다. 그런 때라고 네 겨레 중에서 이 책에 기록된 사람만은 난을 면할 것이다.” 그리고 종말론적 예언의 차원에서 모든 시기의 교회가 감당해야 할 모든 투쟁과 박해를 암시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더럽혀진 생활을 깨끗이 청산하고 용서받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즉, 어린양이 겪은 시련과 고통의 결과로서 의인들이 나타나게 된다. 구약에서 죄로 자기 옷을 더럽힌 사람과 하느님의 능력과 자비와 은혜로 깨끗해지고 정결하게 된 사람의 모습을 그린 것같이 묵시록에서도 흰옷 입은 사람들이란 하느님의 자비로 용서받고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 사람들이 자기 예복을 어린양의 피로 희게 빨았다는 것이란 인간 구원 사업은 인간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임을 말한다. 그러나 또한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고 죽으심으로써 얻은 선과 그 효과가 자동적이고 피동적인 것은 아니며 인간이 그리스도의 피의 효과를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하다는 뜻도 포함한다. 제2독서 <우리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 주해 1절 3,1-10에서는 현재와 종말의 구원을 논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는 표현으로 현재의 구원을. “우리가 그분을 닮게 되리라...”는 표현으로 종말의 구원을 약술한다. 구원에 훼방을 놓는 것들로는 하느님, 그리스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적대적인 세상, 그리고 세상을 지배하는 악마가 나온다. 필자가 윤리적 동기로 구원론을 피력한 점에 유의하라.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자녀들답게 살아야지, 악마의 자녀들처럼 살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예수 강생과 죽음으로 이룩하신 과거의 구원 위업은 앞뒤 여러 단락에서 언급한다. 필자는 그리스도인들은 일컬어 “아들”또는 “하느님의 아들”이라 한다. 예수께서는 친아들이요, 그리스도인들은 양아들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겠다. 단, 그리스도인들은 법적 양자 정도가 아니라 실존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을 받아 진짜 자녀들이 된다고 필자는 보았다. 2절 그리스도인들의 종말 축복을 약술하여 “그분을 닮을 것이요,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뵈올 것”이라고 한다. 여기 두 차례 나오는 “그분”은 누구냐? 그리스도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하느님이라는 설도 있다. 신약성경 종말론에서 “닮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또한 신약성경 종말론에서 “봄”은 주로 하느님을 뵙는다는 뜻 또는 예수를 뵙는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3절 “그분께 이런 희망을 걸고 있는 모든 이는”의 “그분”은 그리스도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하느님이라는 설도 있다. “저분이 깨끗하신 것처럼 자신을 깨끗하게 합니다”의 “저분”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 옛날 깨끗한 레위들만이 천막 성전 하느님 어전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제 깨끗한 그리스도인들만이 하느님을 닮을 수 있고 뵐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본디 작죄하신 적이 없으니 깨끗하시다. 그럼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깨끗해지나? 예수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셨고, 언제고 하느님 앞에서 작죄한 우리를 변호해 주시기에 우리는 깨끗해질 수 있다. 복음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주해 진복선언 어록에는 네 진복선언이 있었는데, 루카는 비교적 충실히 옮겨썼고, 마태오는 다섯 진복선언을 보태서 아홉 진복선언을 만들었다. 어록이나 루카복음에서는 가난한 이들, 굶주린 이들, 우는 이들이 복되다 한다. 이는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싶도록 서럽지만 곧 하느님의 나라가 오면 불행한 자들이 그 나라를 차지하고 배불리 먹고 웃고 즐길 것이므로 복되다는 뜻이다. 비참한 현실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미래 희망, 곧 종말 축복 때문에 행복한 것이므로 복되다는 뜻이다. 마태오는 어록의 진복선언 넷을 아홉으로 늘렸을 뿐 아니라 윤리적 관점에서 진복선언 넷을 각색했다. 그냥 가난한 이들이 행복한 것이 아니고 “영으로 가난한 이들이”행복하다. 3절 ”영“과 ”가난한 이들“은 매우 흔한 낱말이다. 그러나 구약. 신약을 통틀어 두 낱말이 함께 붙어 사용된 경우는 없다. 오직 마태 5.3에만 ”영으로 가난한 이들“이란 표현이 나온다. 그러니 그 뜻이 자못 불분명할 밖에. 그런 차에 1947년부터 발견된 쿰란 문헌에 보면 ”영의 가난한 이들“이란 표현이 두 번 나오는데, 예수 시대 쿰란 수도자들이 그렇게 자처했다. 5절 기원전 1200~1000년에 이스라엘 백성은 팔레스티나 땅을 점령하여 지파별로 나누어 가졌다. 제3이사야서에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 상속을 약속하는데, 여기서는 종말 축복을 가리킨다. 쿰란 수도자들도 자기네는 선택된 이들의 공동체인만큼 땅을 상속받으리라고 믿었다. 이제 마태 5.5에서는 하느님의 새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이 땅을 상속받으리라 하는데, 여기 땅은 하늘나라를 가리킨다고 여겨진다. 6절 마태오가 강조하는 ”의로움“은 하느님의 뜻을 행함이다. 그러니까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를 갈망하는 이들이다. 7절 하느님은 제사를 바라지 않고 자비를 바라신다. 모름지기 제자들은 하느님의 자비로운 처사를 본받아야 한다. 하찮은 십일조는 지키면서 막중한 정의와 신의를 저버려서는 안된다. 예수께서는 불쌍한 사람들이 자비를 간청하면 꼭 들어주신다. 또한 돌보는 이 없는 군중을 불쌍히 여기신다. 그리고 불쌍한 이들을 돌보면 종말 심판 때 구원받는다고 하신다. 8절 구약: ”하느님을 뵙는다(이사 1.12.)“하느님의 얼굴을 뵙는다”(시편 42.3)는 것은 하느님이 계시는 성전에 참배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유다교: 의인들의 영혼이 하늘에서 하느님을 뵙는다(에즈라 4서 7.91.98). 그리스도교: 종말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뵙는다.(1고린 13.12;1요한 3.2; 히브 12.14.묵시 22.4). 9절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은 개인적 또는 사회적 차원에서 이해와 화해를 증진하려고 적극 투신하는 사람들이다. 평화의 기도 대로 사는 사람들이다. 구약과 유다교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백성의 대표인 임금, 미래의 메시아 임금, 의인을 하느님의 아들로 여겼다. 이제 평화를 이룩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은 장차 하느님의 아들로 일컬어질 것이라 한다. 원수들을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만큼 평화적이어야만 하느님의 아들로 불릴 것이다. 10절 마태오 시대 박해상을 드러내는 말씀들 참조; “이 도시에서 여러분을 박해하거든 다른 도시로 피하시오, 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인자가 올때까지 여러분은 이스라엘의 도시들(전도)를 끝내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예언자들과 현자들과 율사들을 보낸다. 너희는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형에 처하며,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도시에서 도시로(뒤쫓아다니며) 박해할 것이다. 12절 12절의 예언자들은 마태오복음 집필 당시 이 교회 저 교회로 다니면서 예언활동을 벌인 그리스도교계 떠돌이 예언자들이다. 이와는 달리 병행문 루카 6,23의 예언자들은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일 것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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