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둘째 미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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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11-01 | 조회수448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은 죽은 모든 이의 영혼,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이다. 오늘 모든 사제는 세 대의 위령 미사를 거행할 수 있다. 이러한 특전은 15세기 스페인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시작되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정성껏 묘지를 방문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5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9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 하느님께서는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제2독서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주해 17절 “한 사람의 범죄로 초래된”을 직역하면 “한 사람으로부터”. 18절 직역하면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행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단죄에 (이르렀듯이), 한 분의 의로운 행위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의화에 (이르렀습니다)” 20절 4.15; 7,7-25 참조. 21절 그리스도가 드러내신 의로움은 은총의 구체적 표현으로서 사람을 죽음의 세력에서 구원하는 방법이다. 복음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주해 감사 기도 –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11,25-27 단락은 찬양기도와 계시 말씀으로 짜여 있는데, 역시 어록에서 따온 것이다. 25-26절은 공관복음에 수록된 예수님의 하나뿐인 찬양기도다. 그 내용으로 미루어 감사기도라 해도 좋다. 예수께서는 기도하실 때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셨다. 게쎄마니에서 청원기도를 바치실 때 그러셨으니,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도 그러셨을 것이다. “슬기롭고 똑똑한 사람들”은 아무래도 율법을 알고 지키는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겠다. 반대로 “어릭석은 사람들”은 율법을 알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않는 무리다. 암 하 아레츠(땅의 백성= 시골뜨기들, 촌놈들, 상것들)라는 딱지가 붙은 무리다. 최고의회 의원들과 바리사이들에게서 “과연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로다”라는 막말을 들은 무리다. 매우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리석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다. 23장에 율사들. 바리사이들과 제자들이 적수로 나오는 사실이 위의 풀이를 뒷받침한다. 아빠께서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는 감추시고 제자들에게는 계시하신 “이것들”은 무엇일까?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느님의 계시자이신 예수님의 정체를 뜻할 수도 있겠고,또는 예수님의 설교 주제인 하늘나라의 신비들을 가리킬 수도 있겠다. 어떻게 보아도 괜찮다. 하늘나라와 그 나라의 선포자는 한통속이기 때문이다. 이제 감사기도의 뜻은 밝히 드러난다. 유다교 지도급 인사들에게 배척을 받아 이스라엘 전도가 사실상 실패하던 무렵에, 그렇지만 극소수 암 하 아레츠만이라도 당신을 이해하고 따라준 데 감격해서 이 감사기도를 드리셨다. 크게 실패하고 아주 조금 성공을 거두신 때에 이 감사기도를 바치셨다. 못난 제자들만이라도 당신을 이해하고 따르는 것은 아빠께서 계시하신 덕분이요 아빠께서 선의를 드러내신 덕분이라 하신다. 사도 바오로가 데살로니카 교우들에게 “모든 일에 감사하시오”라고 충고하기 훨씬 이전에 예수님은 몸으로 실천하셨다. 27절 27절은 본디 앞뒤 문맥과 상관없이 전해온 단절어였는데, “아버지”와 “계시하다”라는 낱말들이 25-26.27절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어록의 전승자 또는 편집자가 한곳에 배열했다. 이른바 연쇄어 구문이다. 계시의 말씀에는 세 가지 내용이 들어 있다.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은 조상들에게서 전승을 물려받은 데 반해, 예수께서는 당신 아버지이신 하느님에게서 모든 계시를 전해 받았다.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아드님만이 서로를 안다. 오직 예수님에게서 계시를 받은 사람만이 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 있다. 이 세 가지 내용은 요한복음의 그리스도론과 매우 비슷하다. 이런 그리스도론이 50~60년경에 쓰인 어록에 있다니, 아니 어록 이전의 전승에게까지 소급되다니 놀랍다. 초대 말씀 초대 말씀은 유다교 지혜문학에 나오는 인격적 지혜가 어리석은 사람들을 초대하여 지혜를 익히도록 권하는 초대사와 닮았다. 특히 집회 51,23-27과는 문체와 낱말들조차 닮았다. 그래서 28-30절은 본디 지혜문학 유형에 속했다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28-30절 가운데서 편집사적 요소들을 삭제하고서 지혜문학에서의 초대사를 재구성하면 대충 다음과 같다. “수고하는 여러분은 다 나에게로 오시오. 그러면 내가 여러분을 쉬게 하겠습니다. 여러분 위에 내 멍에를 메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에 쉼을 얻을 것입니다. 사실 내 멍에는 편하고 가볍습니다. 마태오가 지혜의 초대사를 예수님의 초대사로 바꾸면서 크게 두 가지를 가필했다고 하겠는데. 그 뜻인즉 유다교의 613가지나 되는 율법계율을 ”짐진“까닭에 짓눌린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가벼운 ”내 짐“을 지우신다. 어째서 예수님이 지우는 짐은 가벼운가? 유다교의 613가지 계율을 황금율과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환원시키셨기 때문이다. “나에게서 배우시오. 나는 온유하고 마음으로 겸손하기 때문입니다”도 가필이라고 본다. 까닭인즉, 여기 낱말들이 다른 데서도 마태오가 덧붙인 낱말들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마태오는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모습을 돋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에게 이 초대사를 적용할 수도 있다. 즉 인생고와 나날의 긴장에 지친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위안과 휴식을 찾는 식으로 말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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