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02.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한 해도 기울어 가고,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오늘 우리는 먼저 세상을 떠난 부모, 형제, 친지들과 은인들, 지인들의 영혼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어둡고 시린 길 위에 떠밀려 넘어진 이태원 거리의 어린 영혼들을 기억합니다.
거부할 수 없는 시간의 손길이 계절의 등을 떠밀어, 이제는 가을도 끝자락에 떠밀려 왔습니다. 기울어져 가는 가을의 어깨 너머로 흩날리는 낙엽들이 이리저리 달을 따라 흐르는 밀물과 썰물처럼 바람을 따라 밀려다니고, 넘어지고 부서진 날들의 잎사귀들이 바닥에 온몸을 부벼대고 바스러지면서 침묵의 강물로 흘러듭니다.
스위스의 작가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 속에서 일년 사계절은 변해간다. 봄은 겨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부터 온다. 겨울도 그리고 여름도 가을도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가을은 결실의 풍요로움과 단풍의 아름다움을 뒤로하고 침묵의 신비 안으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침묵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침묵은 죽음임과 동시에 잉태요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생명의 탄생처럼 신비롭습니다. 아니, 죽음이 있기에 인생은 신비롭습니다. 이토록, 죽음은 인생의 신비를 알려줍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죽음이 신비한 것은 죽음이 한 생을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생명의 신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곧 죽음을 통해 생명이, 생명을 통해서 죽음이 밝혀지듯, 이 세상의 제한된 생명은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밝혀줍니다.
사실, 우리는 ‘영원’을 배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본래 영원불멸한 존재인 우리의 영혼이 영원하면서도 영원한 줄을 모르기에 이 세상의 한계와 제한을 통하여 영원한 존재임을 배우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악을 보면서야 선이 무엇인지를 배우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죽을 몸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10)
오늘도 우리는 죽음을 몸에 달고 다닙니다. 하루하루 죽으면서 삶을 살아갑니다. 새싹처럼, 내 몸 안에서 단풍을, 곧 죽음을 성숙시켜갑니다. 아니, 영원의 향하여 달려갑니다.
마지막 교부 철학자인 보에티우스(470~524)는 말합니다.
흘러가버리는 지금이 시간을 만들고, 머물러 있는 지금이 영원을 만든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여라,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자비롭게 하소서. 당신의 자비의 입었으니,
제 마음이 깨끗해지게 하소서. 당신 손길로 매만지셨으니,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당신 영으로 이끄셨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당신이 동행하시니,
저를 다스리소서. 저는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오니,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