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9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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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11-08 | 조회수387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오늘 전례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의 대성당이다. 오늘 축일은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대성전은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으로 불리면서 현재의 베드로 대성전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거의 천 년 동안 역대 교황이 거주하던, 교회의 행정 중심지였다. 각 지역 교회가 로마의 모(母)교회와 일치되어 있음을 드러내고자 라테라노 대성전의 봉헌 축일을 지낸다. 제1독서 주해 10절 “내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 5절: 12.3: 15.10“로마 12.3; 1515; 갈라 2.9; 에페 3.7 등을 함께 보면 ”하느님의 교회“를 박멸하려고까지 했던 바오로 자신이 복음선포자로 하느님으로부터 부름받았다는 것을 얼마나 은혜로운 일로 생각하는지가 역력히 보인다. 11절 1,2-24‘2.2 참조. 에페 2,19-21에 따르면 신앙 공동체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을 기초로 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 모퉁잇돌이 되어 세워진 성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에페 2.20이 여기 11절과 모순된다고 볼 수는 없다., 에페 2.20에서는 그리스도를 공동체의 “기초”라고 하는 대신에 “모퉁잇돌”이라고 함으로써 공동체에 대해 그리스도의 핵심적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에 비해 에페 2.20에서는 복음선포자들,특히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변조시키는 선포행위에 대하여, 특히 “복음선포자들”에 대한 오해 때문에 오히려 복음 자체를 변조시키는 결과가 오는 것을 경고한다. 16절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요,... 성전을 파괴하면...”이라는 문장에서 “여러분”이라는 말로 바오로는 공동체의 구성원 각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공동체” 전체를 염두에 두고 있다. 고린토 공동체가 세상의 지혜를 앞세우고 파당을 이루며 분열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는 맥락을 감안할 때 더욱더 그렇다. 12,12-21에서 바오로는 신앙 공동체를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표현에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른다. 여기 16절에서와는 달리 6,19에서 바오로는 음행을 피하라는 권고를 하면서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있는 성령의 성전이다”라고 한다. 쿰란 공동체에서도 자신들의 공동체를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칭하곤 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이 “만남의 장막” 안에 또는 시온 산 위의 “성전 지성소”에 현존하면서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시다고 믿었다. 복음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주해 성전 정화 이 이야기는 공관복음에도 보도된다. 그러나 공관복음은 예수의 공생활 말기에, 요한복음은 초기에 성전 정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도한다. 연대기적으로 어느 보도가 역사적 신빙성이 더 있는가에 대한 해답은 쉽지가 않다. 사실상 네 복음 모두 정화가 역사적 사실인 것만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저자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미로 보도하고자 하는가에 주안점을 두고 텍스트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 저자는 성전 정화를 가나 기적처럼 예수의 자기계시로 설명하면서 예수를 믿는 제자들과 믿지 않는 유다인들을 대조한다. 특히 유다인들이 예수에게 “표징”을 요구함으로써 예수에 대한 그들의 몰이해와 불신이 폭로된다. 이렇게 예수의 공생활 초기부터 적수들이 등장함으로써 예수의 은명을 예감케 한다. 13절 요한복음은 예수가 공생활 동안 세 번 해방절을 보낸 것으로 보도한다. 이에 따르면 예수는 3년 가까이 공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유다인들의 해방절”이란 표현은 “유다인들의 율법”처럼 유다인들과의 거리감을 시사한다. 여기서 “유다인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적수로 등장한다. 예루살렘 도시가 해발 760미터쯤이고 갈릴래아 호수가 해저 200미터쯤이므로, 예루살렘으로 향해 갈 때는 으레 이런 표현이 쓰인다. 아마도 예수는 해방절을 맞이하여 순례차 예루살렘으로 간 듯한다. 14절 성전 마당 가운데서도 외부에 속한 구역인 이른바 “이방인 마당”에서는 여러 장사꾼과 환전상이 특히 축제일을 앞두고 대성황을 이루었다. 순례자들이 성전에 바칠 제물과 성전세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성전세는 고대 시리아 화폐로만 지불해야 했는데, 시중에서는 로마제국 화폐만 사용했으므로 성전에서는 환전상이 필요했다. 원문에는 “성전”(마당)으로만 언급되어 언급되어 있다. 즉, 성전 마당과 주랑을 포함한 전구역을 뜻한다. 따라서 성전 어느 구역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15절 예수는 장사꾼과 환전상들만을 상대로 성전 정화를 펼친 것으로 보도된다. 16절 성전 정화를 하고자 한 예수의 의도가 표현된 말이다. 특히 “내 아버지의 집”이라는 표현이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성전 정화를 함을 시사한다. 따라서 성전 정화를 예수의 메시아적 행위로도 이해할 수 있다. 17절 제자들은 예수의 성전정화사건을 시편 69.10의 내용에 비추어서 이해했다는 저자의 설명이다. 즉, 제자들은 “하느님의 집”에 대한 예수의 열정이 위험한 결과, 곧 죽음을 초래할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18절 “유다인들”은 제자들과 달리 예수가 성전에서 행한 일에 대해 일종의 심문 형식으로 말을 걸어온다. 즉, 자기네들의 인정할 만한 “표징”을 요구한다. 이 “표징”은 예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종의 신적 증거를 뜻한다. 한마디로 믿지 않는 자들이 요구하는 “표징”이다. 또한 이들의 표징 요구는 유다 지도자들이 제기한 예수의 “권위”에 대한 물음과도 흡사하다. 따라서 여기서 “유다인들”이란 믿지 않는 자들을 특징적으로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19절 예수는 “유다인들”이 요구한 표징과 전혀 다른 표징을 제시한다. 그러나 예수의 이 대답은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한 계시 말씀이다. 20절에서 “유다인들”의 오해가 언급되고, 21절에서 저자의 설명이 따른다. 여기서 성전은 지성소가 딸린 성전 건물을 가리킨다. 14절에서 언급된 성전과는 다르다. 20절 “유다인들”은 예수의 계시 말씀 가운데 언급된 “이 성전”을 당시 세워져 있던 성전 건물로 이해하고자 예수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헤로데 대왕이 기원전 20/19년 경부터 성전 신축공사를 시작했으니, “46년” 뒤라면 27/28년경 곧 예수의 공생활 성전정화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1절 예수는 자기 몸이 곧 “성전”임을 가리켜 말했다고 저자는 설명함으로써 “유다인들”의 오해도 지적한다. 저자의 이 설명으로 인해 특히 예수의 계시 말씀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는 것으로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예수는 자신의 몸을 “허물도록”자유롭게 내주지만,“사흘 안에 다시 세운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 자신에게 부여된 죽고 부활한 자유나 권능도 아울러 시사된다, 예수의 “몸”이 “성전” 곧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이므로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이 예수와 함께 예수 안에서 시작된다.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은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중심이요, 하느님의 현존의 장소이며, 생명수가 넘쳐흐르는 영적 성전이다. 22절 제자들은 예수 부활 후 성령을 받고서야 비로서 예수의 계시 말씀을 상기하고 “성경”과 예수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는 저자의 설명이다. 여기서 “성경”은 예수가 죽고 부활한다는 말씀인 17절에 인용된 구절을 구체적으로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즉, 성전 정화와 성전에 관한 말씀이 예수의 “영광”을 들어내는 계시로 설명된다.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믿음을 강조한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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