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4 연중 제33주간 월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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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11-13 | 조회수256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제1독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여라.> 4 요한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글을 씁니다. 2,1 “에페소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3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주해 1절 예수 그리스도는 이 계시의 주어인 동시에 목적어 역할을 한다. 즉, 이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계시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다. 그리스오 원어는 아포칼뤼프시스. 그리스 문화권과 그리스어 구약성서에서 자주 나타는 용어다. 2세기경부터 묵시록을 가리키는 전문용어로 사용되었다. 묵시문학 용서로서의 “계시”란 “환시”와 “그 자체의 해석”을 아울러 표시한다. 초기교회에서 이 용어는 종말에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발현을 표시하는 전문용어로 변화되었다. 묵시문학적 성격이 잘 드러나는 표현이다. 또한 이 표현은 하느님 계획의 철회할 수 없는 성격과 그 긴박함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교 묵시록에서 이 표현은 다니 2.28에서 유래하는, 성서적 계시의 모든 내용을 포함한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으로 이미 시작한 하느님 구원의 역사는 마지막 날 그분의 영광스러운 재림으로 완성되리라는 것이다. “당신 종들”은 초기교회 예언자들이다. 그러나 묵시록에서 이 말은 동시에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와 신도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천사의 중재는 묵시문학의 한 특징이다. 저자는 하느님의 “종” 요한으로 지칭한다. 이는 자신을 “하느님의 종”들인 옛 예언자들 반열에 넣음으로써 자신의 예언적 사명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2절 그리스도교 메시지 전체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특별히 예언적인 이 책에 담겨 있는 계시들을 가리킨다. “증언”은 요한계 문헌에 자주 나오는 특색있는 용어다. 신약성서에 다른 부분에서와 비슷하게 묵시록에서 증언의 주재는 메시지의 예언적 특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증거자인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거나 천상적 존재의 현시나 하느님의 섭리를 느낀 사람이다. 이 높은 차원의 체험은 동시에 선교로의 파견을 의미한다. 증거자는 자기가 보고 이해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자적 지혜로써 신앙의 응답이 나오도록 전해주어야 한다. 요한계 문헌의 다른 곳에서도, 그렇듯이 묵시록에서 예수는 하느님 섭리의 가장 완전하고 탁월한 증언이시다. 이 계시의 수혜자이며 성령으로 인도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 증언을 전할 사명을 지닌다. “충실한 종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세속권력의 반대와 박해를 이겨내야 한다. 그리스어 아르튀리아는 일반적 의미로 “증언”을 뜻하지만 그리스도교 용어로서는 특별히 “순교”의 의미도 지니게 된다.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그리스도교 증언자는 자신의 증언을 자신의 피로써 확인해야 한다. 3절 묵시록의 일곱 행복선언 중 첫 번째다. 이밖에도 행복선언이 나타나는 여섯 곳은 14.13; 16.15;19.9;20.5;22.7.14. 저자는 이 책을 여기서도 끝부분인 22.7.10.18에서도 예언으로 소개한다. 이로써 저자는 단순히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한다는 것 외에도 바로 이 책에서 구약과 신약의 모든 예언이 만나고 완성된다고 말하고자 한다. 성서의 말씀을 회중 가운데서 선포할 권리를 위임받은 사람과 그 말씀을 듣는 회중을 가리킨다. 이 책은 성서로서 교회에 주어진 것이며, 동시에 신자들이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생명의 말씀을 발견할 수 있도록 공적인 모임에서 읽혀야 할 책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교회에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단순히 잘 보존하는 데 그쳐서는 안된다. 그 말씀의 중요한 의미를 깊이 깨달아야 하며 동시에 그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갈망하던 그리스도 재림과 그에 따른 하느님 심판의 임박함이 이 책을 쓴 동기로 나타난다. 이 책에 담긴 신비의 계시는 신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우며 동시에 하느님 왕국 원수들에게 무서운 위협을 주는 긴박한 호소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재림에 관해서는 1.7; 3.11; 22.10.12.20 참조. 4절 “아시아”란 마카베오서에서 셀류쿠스 왕국을 일컬었고, 130년경 로마시대에는 로마총독이 주재하던 베르가모 왕국 지역들, 현재 터키 지방인 서쪽 소아시아에 있던 로마 속주를 말한다. 저자는 이 책을 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로 소개한다. 1.11에 이 교회들이 하나하나 열거되며 2-3장에 편지 내용들이 나온다. 그러나 성서에서 7이란 “충만함”,“완전함”을 나타내는 상징적 숫자다. 유다교 묵시록뿐 아니라 묵시록 저자는 아시아에 있는 구체적 일곱 교회를 지칭하면서 동시에 7이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모든 교회에 메시지를 전한다. 묵시록에서 하느님을 호칭하는 전형적 표현으로 이곳외에 1.8; 4.8; 11.17; 16.5에도 나온다. 하느님이 호렙 산에서 모세에게 자기를 계시하신 이름에서 발전되었다고 보인다. 그분은 현재와 과거와 미래 역사의 최고 주님이시다. 예루살렘 타르굼에서도 시간을 가지고 하느님을 호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묵시록에서는 이 장엄한 호칭을 수용하면서 “있을 자”를 “장차 오실 분”으로 바꾸어 재림이라는 종말론적 주제를 강조한다. 유다이즘 사고에 따르면 하느님은 최고의 천사들에 의해 둘러싸여 계시며 그 대천사들은 항상 하느님 면전에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일곱 영은 교부들이 지적한 대로 충만한 은사를 가진 성령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5절 이사 55.4에서 “증인”이란 메시아를 가리키며, 시편 89.28에서 메시아는 “천상의 충실한 증인”과 비교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증언은 단순히 “본디오 빌라도에게 당당히 증언”하신 당신 피의 증언만이 아니라.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고 하신 말씀대로 넓은 의미에서 모든 신적 계시로 확장된다. 4절의 하느님처럼 5절의 “예수 그리스도”도 세 가지로 수난과 부활과 구원을 암시하는 형태로 묘사된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새로운 탄생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표현이 골로 1.18에 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최초의 분”. 이 개념은 시편의 신학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적용하는 초기교회 교리교육에서 생겼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사도 13.33 참조). 단순한 인사를 넘어서 이 두 말은 바오로 사도가 자주 연결하여 사용한 이래 신적 축복과 그리스도교 인사의 특징을 지닌다. 일부 사본에서는 “풀어주고” 대신 “씻어주시고”. 이곳에서는 불가타 역본을 따른다. 2장 1절 에페소는 소아시아 서쪽 해변 도시로서 로마 속령 “아시아”주의 수도.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지중해에서 유명한 항구였다. 도어양일 서로 만나는 곳으로 무역이 활발했으며, 다양한 종교의 중심지였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는 황제숭배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50~55년에 바오로 사도가 이곳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건설했다고, 아시아 주 선교의 거점 역할을 했다. 70년경에는 동양 그리스도 신앙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사도 요한이 생애의 마지막 시기를 이 에페소에서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 에페소 교회의 상황과 도시의 발전상에 대해서는 사도 19-20장 참조. 일곱 별을 쥐고 일곱 황금등경 사이를 거니시는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2절 초대교회 때부터 사도나 예언자로 자처하는 순회설교자들에 대해 그 진위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했다. 사도행전이나 바오로 서간에 보면 전도사들이 파견될 때 임명장을 가지고 나간다. 교회에 정식으로 열두 사도도부터 파견받아 나온 사람인지, 나름대로 와서 자기 것을 가르치는 사람인지 구분하는 임명장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에페소 교회는 이것을 시험해 본다. 그래서 거짓 사도를 쫓아내고 교회의 전통적인 것을 받아들인 것에 칭찬을 받게 된다. 이러한 부류의 사도들에 대해 에페소 교회에서 어떻게 대처했는지는 에페소에 보낸 이냐시우스의 편지에 잘 드러난다. “나는 일찍부터 여러분이 새로운 교리를 가지고 찾아온 자들에 대해 여러분 사이에 자리잡지 않도록 허락하지 않고 그들이 여러분 사이에 떨어지지 않도록 여러분의 귀를 막은 사실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초대교회 저서인 디다케와 헤르마스의 목자 등에도 잘 나타난다. 4절 이미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교회에 “양떼를 아끼지 않는 이리떼”가 나타나 “거짓된 말”로 신자들을 현혹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바오로 사도 당시의 그 뜨거웠던 사랑은 이미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 가졌던 사랑”이란 에페소 교회가 처음가졌던 열성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에페소 신도들이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형제에 대한 관대한 사랑을 항상 가지고 있었던 것을 가리킨다. 이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꾸지람을 듣게 되고 바로 처음과 같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굳어지면서 형제들을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다시 가질 때 하느님의 축복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표현법은 예레 2.2의 “약혼시절의 네 사랑”을 반영하는 것 같다. 5절 조건부적인 질책과 징벌을 나타낸다. 일곱 등경은 일곱 교회를 가리킨다. 즉, 교회를 버리겠다는 말이다. 에페소가 아시아에서 차지하던 교회의 첫 자리를 잊어버리든지, 교회의 자격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뜻이다. 복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40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주해 예리고의 소경을 고치시다 18,35-43은 루카가 마르 10,46-52를 옮겨쓰면서 가감.수정한 것이다. 35절 마르 10.46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예리고에서 떠나갈 때에”치유이적을 행하셨다. 루카는 이를 수정하여 예리고에 들어가실 무렵에 행하셨다 한다. 마르 10.46에서는 소경의 이름을 밝혀 “티메오의 아들 바르티메오라는 소경”이라 하는데, 루카는 그 이름을 삭제했다. 37절 37절의 “나자렛 사람”은 그리스어 나조라이오스를 번역한 것인데, 루카는 사도 2.22; 3.6; 4.10; 6.14; 22.8; 24.5; 26.9에서도 같은 낱말을 사용한다. 그런가하면 루카는 “나자렛 사람”이란 뜻으로 또 다른 그리스어 나자레노스를 사용하는 수도 있다. 루카와는 대조적으로 마르코는 나자레노스란 낱말만 사용한다. 40절 40절은 루카가 마르 10,49-51ㄱ을 압축한 것이다. 41절 루카는 랍부니를 “주님”으로 고쳤다. 이방계 그리스도인 독자들을 생각해서 그렇게 했다. 43절 “하느님께 영광을 돌렸다....찬양을 드렸다”는 루카의 가필. 그 내용이 2.20과 유사하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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