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5 연중 제33주간 화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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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11-14 | 조회수280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제1독서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을 것이다.> 3 그러므로 네가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들었는지 되새겨, 6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17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 하고 네가 말하지만, 20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주해 1절 사르디스는 티아디라에서 남쪽으로 50키로미터쯤 스미르나에서 동쪽으로 80키로미터 떨어진 곳에 리디아 왕국 수도로서 고대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높이 450미터의 3면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천연요새를 이룬 난공불락의 도성이었으나, 기원전 546년에는 고레스에게, 218년에는 안티오쿠스 3세에게 함락되었다. 묵시록 당시에는 그 위세를 잃고 그저 양털과 모직물의 집산지로 알려져 있었다. 멜리톤의 설교에 의하면 이곳에 상당히 규모가 큰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있었다. 이 그리스도 호칭에는 이미 언급된 1.4의 “하느님의 일곱 영”과 1.16의 “일곱 별”이 나온다. “하느님의 일곱 영”은 하느님의 옥좌 앞에 있는 일곱 천사 혹은 더욱 가능한 해석으로는 7의 상징을 통해 성령을 충만히 가지신 분을 나타낸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 즉 천상적 차원의 교회 자체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종말론적 실현인 이 천상적 차원을 손안에 가지고 계시다. 모든 일에 대한 피상적이 아닌 진실된 인식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모든 소행을 잘 알고 계시다. 그들의 모든 소행이 겉보기에는 살아 있는 듯하지만 뒤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의 여러 업적은 하느님 앞에서 볼 때 중요한 무엇을 잃어버린 것이다. 2절 “깨어나라”.: 이 경고는 공관복음에 자주 나오는 주제다. 16.15에도 같은 말이 나온다. “약한 양을 잘 먹여 힘을 돋우어 주어야” 한다고 목자의 의무를 일깨우는 에제 34.4도 연상시킨다. 3절 사도들의 설교에 의해 교회에 전해진 신앙을 잘 보존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마태 24.42~43//을 시사한다(1데살 5.2.4 참조). 4절 “옷을 더럽히다”는 “악에 물들다”의 비유적 표현이다. 사르디스 교회에는 악(이교도 정신?)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더러 있다고 말한다. “사람”의 직역은 “이름”(인간 혹은 인격의 의미로 사용된다). 직물로 유명한 사르디스인지라 상벌도 옷 색깔로 이야기한다. “흰옷”은 부활과 영광받은 몸인 초월적 상태를 상징한다. 그 눈부신 때문에 하느님. 천사.뽑힌 사람들의 옷을 흰옷이라 한다. 여기서 “옷”은 18절과 16.15에서처럼 복된 삶 안에서 천상의 옷을 입을 의인들의 영적 생명을 상징한다. 5절 “생명의 책”에 이름이 적힌다는 것은 다니 12.1에 나온다. 그 속에 이름이 적힌 사람은 환난을 면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차지할 것이라 한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하느님 공동체의 시민은 “하느님의 책”또는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메시아 시대의 풍요로움에 참석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반면 악인들은 의인의 무리에서 제외디며 “생명의 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것이다. 이 표상은 신약성서에도 자주 나오며, 특히 묵시록에 자주 나타난다. 라오디게이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 14절 사도 바오로도 골로 4.15-16에서 언급한 바 있는 라오디케이아는 기원전 3세기에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고, 모직물이 성행한 상업도시요 무역과 은행도시였으며, 의학도 상당히 발달했다. 특히 안약이 유명해서 수출도 했다. 그래서 여기에도 안약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리고 강가에 자리잡은 라오디게이아는 필라델피아 남동쪽 65키로미터 지점에 있으며, 류마티즘 치료에 필요한 온천수가 풍부한 히에라폴리스와 골로사이에 가깝다. 기원전 250년경에 건설된 도시로 안티오쿠스 2세가 누이동생과 부인의 이름인 라오디게이아를 도시명으로 삼았다. 많은 유다인이 이 도시에 이주해 와서 살고 있었다. 아멘은 초대교회 때부터 그리스도교 전례에 들어온 히브리어다. “진실하다”는 뜻이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느님 호칭으로 사용했으며, 신약성서에서는 당신 수난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약속을 성취하신 그리스도께 이 호칭을 사용한다. “아멘이시오 믿음직하고 참되신”이라는 표현은 결국 동일한 의미의 삼중적 강조다. “창조의 근원”은 골로 1.18에 나오는 “모든 것의 시작”과 같은 표현이다. 바오로 사도가 라오디게이아 교회 신도들에게도 읽기를 권했던 골로사이서와 유사한 이런 표현들을 통해 저자는 라오디게이아 교회에게 바오로의 서간을 통해 알게 되었던 것들을 되새기게 한다고 볼 수 있다. 15절 라오디게이아 교회 공동체에는 열기가 사라져 버렸고, 믿음에 있어 조금도 칭찬을 받을 것이 없다. 문제는 교회가 미지근하다는 것이요, 그것은 오히려 죽은 것보다도 더 심각하다는 것이다. 즉, 스스로 만족하고 있기에 아무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18절 라오디게이아는 동양과의 교통요지로서 상거래가 성행하고 은행업이 발전했으며 양털로 짠 모직류로도 유명했다. 특히 멘이라는 신전에 유명한 의학파가 있었는데, 그 중에도 제욱시스와 알렉산더 필랄레테스라는 두 사람이 테프라 프리지아라는 안약을 제조해내어 유명했다. 그러나 참된 재산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에게서 불로 “정련된 금”(순수한 믿음)이,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안으려면 하느님의 “흰옷”(덕행)이, 눈을 밝히려면 하느님의 “안약”(영적 혜안)이 필요하다. 즉,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현명함을 바로 그리스도에게서 받아 자기 상처를 치료하라는 것이다. 19절 라오디게이아 교회에 보여주시는 애정어린 모습은 잠언 3.12와 유사하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보내시는 경고와 질책은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사랑의 결실이다. 20절 친구보다는 신랑으로서의 사랑을 가지고 라오디게이아 교회를 대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그리스도는 문을 두드리며 집 안으로 맞아들여져 만찬을 함께 하기를 기다리신다. 비슷하게 감미로운 표현이 요한 14.23에도 있다.: “누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밀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우리는 그에게로 가서 함께 살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받아들인 사람과 함께하기를 원하시는 이 사랑의 만찬에 성체성사에 대한 암시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21절 이 종말론적 약속은 20.4에서 성취될 것이다. 같은 약속이 루카 22.20에도 있다. “여러분은 내 나라, 내 식탁에서 먹고 마실 것이며 또한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제자들을 향해 용기를 북돋아 주신 말씀을 반향한다: “세상에서 환난을 겪습니다. 그러나 힘을 내시오, 내가 세상을 이겼습니다”(요한 16.33). 복음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5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주해 2절 예리고에는 유다 지방과 요르단 강 건너 베레아 지방간의 교역을 감시하는 세관이 있었다. 자캐오는 그 세관의 세관장. 8절 8절을 루카의 가필로 보는 이유는 다음 세 가지다. 루카는 회개와 자선을 남달리 강조하는데, 8절의 자캐오는 회개를 결단하여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기로 작심한다. 7절과 9절을 직결시키는 것이 순리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파격적 처신에 대해 투덜거리자 예수님이 답변하시는데, 같은 사례가 마르 2,15-17에 있다. 8절엔 루카가 애용하는 낱말과 문체가 첩첩이 있다.: “일어서서”: 신약성서 가운데 오직 루카 18,11.40; 19.8; 사도 2.14;5.20; 7.22; 25.8; 27.21에만 나온다. “...향하여 말하다”: 루카의 전형적 문체로서 일일이 다 지적하기 어려울 정도다. “소유”: 네 복음서에 열한 번 나오는데, 마태 19.21; 24.27; 25.14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루카에만 나온다: 8.3;11.21; 12.15.33.44; 14.33; 16.1; 19.8(사도 4.32 참조). “등처먹다”: 신약성서를 통틀어 루카 3.14;19.8에만 나온다. 9절 원래 7절과 9절이 직결되었다고 볼 때 9ㄱ절은 본디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였겠다. “오늘 이 집”은 5절에서 따온 말이다. 루카는 예수께서 공적으로 활약하는 동안 구원을 이룩하셨다고 보았기 때문에 구원의 현재성을 강조하곤 했다. 즉, “오늘”,“이 날”. “때”, “찾아온 때”에 구원이 이룩되었다고 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곱사등이 부인을 고쳐주신 때도 “이 부인은 아브라함의 딸인데”라 하셨다. 10절 예리고 시민들이 예수님의 처신을 비난하자 예수님은 자캐오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니만큼 구원의 혜택을 받아 마땅하다고 답변하셨다. 이는 충분한 답변이다. 그런데도 또 다른 답변이 10절에 있는데 이는 전승자가 첨가했거나 루카가 가필했다는 인상을 풍긴다. 예수께서 비판을 받으실 때 이중 또는 삼중으로 답변하신 것처럼 말하는 실례가 더러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두 가지 또는 세 가지 답변 가운데 한 가지만 예수님의 참 답변이고 나머지는 전승자 또는 복음작가의 가필이다. 그리고 10절은 그 내용이 마르 2.17ㄷ; 루카 15장과 매우 비슷하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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