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6 연중 제33주간 수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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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11-15 | 조회수336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제1독서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 3 거기에 앉아 계신 분은 벽옥과 홍옥같이 보이셨고, 7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둘째 생물은 황소 같았으며, 10 스물네 원로는 어좌에 앉아 계신 분 앞에 엎드려, 주해 1절 묵시록의 모든 새로운 계시가 “그 다음에”라는 말로 시작된다. 구약 예언문학과 외경 묵시록에 자주 나타나는 표현법으로, 환시자가 계시를 받는 특별한 탈혼상태를 나타낸다. 묵시문학에 흔한 표현법. 새로운 현시를 보여주기 위한 초대의 말. 실제로 제자가 하늘 꼭대기로 올라가지는 않는다. 다만 문이 열리고, 새로운 계시에 초대되어 계속 바라보는 상태다. 나중에 보면 하늘에서 천사들이 금대접을 가지고 내려오며, 저자는 지구상에서 천상 안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 초대 말씀인 “올라오너라”는 출애 19.24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은 시나이 산에 나타나 모세를 통해 선택된 사람만 올라올 수 있다고 하신다. “올라오라”고 초대받은 사람만이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고, 하느님의 특별한 계획을 알 수 있다. 2절 옥좌는 4장의 중심이다. 주권자의 자리요, 따라서 거기 앉아 계신 분을 장엄하게 묘사한다. 옥좌와 옥좌에 앉으신 분이란 표현은 구세사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에 대한 하느님의 절대적인 힘을 나타낸다. 피조물에 대한 완전한 지배와 당신 위엄의 영광 속에 소개되는 하느님의 현존이 구약성서의 전통적 예언 방식, 특히 이사 6장,에제 1장, 다니 7장과 같은 방식으로 나타난다. 다른 요소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전례에서 취한 것으로 보인다. 구약성서와 후기 유다문학에서는 자주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옥좌”에 대해 언급한다. 묵시록은 하느님을 여기서도 다른 데서도 직접적으로 명시하지 않고 “옥좌에 앉으신 분”이라고 호칭한다. 그분 얼굴 모습도 “빛나다” 등 간접적으로 묘사한다. 3절 장엄하게 옥좌에 앉아 계신 분을 묘사하지만 어떤 분인지 뚜렷이 지적하지는 않는다. 구약의 표현과도 조금 다르다. 다니 7.9에서 “옷은 눈같이 희고, 머리털은 양털같이 윤이 났다”하고, 에제 1.26에는 “높이 옥좌와 같은 것 위에는 사람 같은 모습이 보였다”한 것과 달리, 묵시록에서는 다만 장엄하게만 나타낸다. 4절 흰옷을 입고 금관을 쓴 원로 24명이 어떤 사람들인지 확실하지 않다. 천사들을 상징한다는 학자들도 있고, 선택받은 사람들, 지상에서 고생하고 승리의 월계관을 쓴 위대한 사람들을 상징한다는 학자들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4장에서 이들이 하는 일을 보면 우선 하느님과 어린양에게 찬미를 드린다. 그리고 둘째로는 저자에게 하느님이 계시하신 내용을 설명해 준다. 또는 몇 명은 향을 담은 금대접을 들고 나타난다. 묵시록에서 향은 성도들 희생의 기도를 가리킨다. 5절 하느님이 세상에 당신 모습을 나타내실 때 따르는 표지다. 시나이 산에서의 신현을 상기시킨다. 예루살렘 성전의 7지 촛대를 상기시킨다. “일곱 등경”을 “천하를 살피는 야훼의 눈”으로 보는 즈가 4.10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일곱 별”은 유다 전승에서 말하는 일곱 천사라기보다 하느님의 영을 총칭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6절 마지막 시기에 새 세상이 새창조되었을 때 바다가 있을 것이냐 없을 것이냐에 대해 묵시록은 바다가 없어진다고 말한다. 새 세상에는 바다가 없다. 바다는 검푸르고 밑이 보이지 않아 악의 세력이 숨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12-13장에서 어린양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12-13장에서 어린양의 원수로서 나타나는 다른 짐승들도 바다에서 올라온다. 모든 악의 세력이 사라진 새 세상이 없을 때는 바다로 나타난다. 에녹 2서 3.3에서는 “나에게 지상에 있는 것보다 더 큰 바다가 보였습니다”라고 말한다. 레위 유언 2.7에서 바다는 첫째와 둘째 하늘 사이에 있다. 성서에서는 천궁 위에 있는 “윗물”과 땅에 있는 바다인 “아랫물”을 언급한다. “수정 바다”는 결국 “윗물”에 같다고 볼 수 있다. 8절 이사 6,2-3에 있는 세라핌의 노래 첫마디 인용문, 끊임없이 이어지는 네 생물의 찬송에 신성의 중요한 요소가 열거된다. 성성과 권능과 영원성. 10절 원로들의 장엄한 경배와 찬미노래는 다니 2-3과 7장에 묘사된 장엄한 전례를 반향한다. 복음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12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16 첫째 종이 들어와서, 18 그다음에 둘째 종이 와서, 20 그런데 다른 종은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22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2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주해 12절 마태 25.14에는 그냥 “사람”. 루카는 왕위를 노리는 “귀족 한 사람”(=예수)으로 개작했다. 마태 25.14에서는 단순히 “여행을 떠나면서”. 루카는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여 주권을 받은 다음 종말에 재림하실 것을 염두에 두고 개작했다. 그리고 12절은 이스라엘 전부를 통치하던 헤로데 대왕이 기원전 4년 사망하자 그 아들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려고 로마 황제를 찾아간 고사를 연상케 한다. 유다인들은 그를 싫어했기 때문에 황제에게 민간사절단을 파견하여 아르켈라오스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황제는 절충하여 아르켈라오스를 단지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의 영주로 책봉했다. 아르켈라오스는 로마에서 이스라엘로 귀국한 다음 자기를 반대한 자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13절 마태 25,15에는 종 세 명을 불렀다 하는데 이 숫자가 더 신빙성이 있다. 사실 루카 19.16.18.20에 보면 종 세명과 셈을 한다. 루카에서는 균등하게 한 종에게 한 미나씩을 맡긴다. 노동자의 일당이 한 데나리온, 백 데나리온이 한 미나다. 노동자의 일당을 칠천 원으로 계산한다면 한 미나는 칠십만 원인 셈이다. 마테오에서는 차등을 두어 “하나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준다”. 대체로 60미나가 한 달란트였으니만큼 요즘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한 달란트는 사천이백만원, 두 달란트는 팔천사백만 원, 다섯 달란트는 무려 이억 일천만 원인 셈이다. 우선 액수가 터무니 없이 엄청나다. 그리고 차등을 두었다는 것은 마태오가 교회직무와 은사의 다양성을 고려하여 개작한 것이리라. 14절 루카는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사실을 상기하여 아르켈라오스의 왕위 계승 고사를 도입했으리라. 15절 “그러나 그는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는”은 루카의 가필. 역시 유다 고사를 연상케 한다. 17절 주인이 왕위를 획득했기 때문에 종들에게 “열 고을”또는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 할 수 있다. 이는 루카의 개작이다. 마태 25.21에서는 주인이 종들더러 이렇게 말한다. “잘했다. 착하고 믿음직스러운 종아. 적은 것에 믿음직스러웠으니 내게 많은 것을 맡기겠다...” 이것이 비유의 원형을 반영한다. 그 뜻인즉, 적은 돈을 잘 관리했으니 더 많은 돈을 맡기겠다라는 것이다. 25절 25절의 항변은 루카복음에만 있다. 루카 자신이 매우 인간적인 항변을 가필했을 것이다. 25절은 시나이.바티칸. 알렉산드리아 사본에는 있고, 베자. 워싱턴 사본에는 없다. 26절 26절은 본디 비유와 무관한 단절어로서 전승과정중에 추가된 것이다. 같은 단절어가 마르 4.25(=마태 13.12=루카 8.18)에도 전해온다. 27절 27절은 루카에만 있는 것으로, 루카가 아르켈라오스의 고사를 도입하는 기회에 덧붙인 것이겠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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