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독서,복음(주해) (성서 주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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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11-19 | 조회수329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전례력으로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다. 축일명대로,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이심을 기리는 날이다. 예수님께서는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백성을 억누르는 임금이 아니라, 당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시며 백성을 섬기시는 메시아의 모습을 실현하셨다. 스스로 낮추심으로써 높아지신 것이다.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이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정하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1985년부터 해마다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간(올해는 오늘부터 11월 26일까지)을 ‘성서 주간’으로 정하여, 신자들이 일상생활 가운데 성경을 더욱 가까이하고 자주 읽으며 묵상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다스림은 절대 권력의 행사가 아니라 바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이웃을 섬기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세우시고 그분의 십자가를 통하여 만물을 화해시켜 우리가 하늘 나라에서 당신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하십니다. 제1독서 -.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다. 제2독서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14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17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주해 12절 12절을 3절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3절에서 사도가 기도드리며 감사하는 내용이 묘사되었다면, 이 12절에서는 공동체가 행해야 할 사항이 그려져 있다. 사도가 그랬듯이 공동체 또한 그를 본받아 거룩하게 된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려야 한다. 덤덤하게가 아니라 기쁨에 넘쳐 감사드림을 뜻한다. “빛 가운데 있는”: 13절의 “어둠”과 대조를 이룬다. 빛은 천상 세계 또는 영원한 분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3,1-4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근본적으로 이미 “위에서, 천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나 다를 바 없다. “상속”: 상속에 참여한다는 말은 하느님 역사하심에 대한 유다 전승을 연상시킨다. 상속을 얻으리라는 것은 먼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이스라엘 자신이 하느님 상속자가 된다는 뜻이다. 다음으로 땅을 차지한다는 것이 곧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지속적인 상속이다. 이는 동시에 구원론적 차원에서 한정적 개념으로 이해된다. 지금까지 구원은 이스라엘인에게만 한정되어 있던, 그들만의 특권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성도 그리스도인 공동체에로 개방된다, 하느님이 그들을 유산 상속자가 되게 하신 것이다. 이 관념은 쿰란 공동체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하느님은 당신이 선택하신 사들에게 깊은 통찰력, 지식, 지혜, 의로움, 영예 등을 영원한 차지로 선사하셨으며 거룩한 이들 가운데 한몫 차지하도록 하신다. 당신 영광을 위해 사람들 죄를 씻어 주셨다. 이제 유산은 땅이 아니다. 그 내용은 13-14절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양상으로 그리스도론적 진술에 함축적으로 묘사된다. 감사의 내용이 들어 있다. “자격을 부여하다. 할 수 있도록 해주다”동사는 신약성서에서 이곳말고는 2고린 3.6에만 나온다. 두 곳 모두 하느님이 무엇을 할 가능성의 원동력, 즉 그러한 능력을 부여하는 주체이심을 해준다. “아버지께”: 감사는 3절에서처럼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감사의 대상이 아주 구체적으로 지칭되지는 않는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또는 “여러분에게” 아버지시라는 차원에서 포괄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라는 기본사상이 전제되어 있다고 본다. 하느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요 여러분의 아버지라는 사실. 그분이 바로 이러한 감사드려야 하는 것이다. 감사의 근거가 무엇인지는 12-13절에서 자세하게 나타난다. 감사의 첫째 이유는 유다교 전승에서 나아가 종말론적, 천상적 차원에서 유산 상속자가 되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분께 드려야 할 감사의 또 다른 이유는 이어지는 13절에서 묘사된다. 13절 관계대명사 호스로 시작되는 이 구절은 두 병행문으로 짜여 있다. “그분”은 앞절의 “아버지”를 지칭한다. 두 문장이 “그리고”로써 동등한 위치에서 병렬되어 있다. 두 문장의 내용도 상응한다. 무엇보다도 눈에 띠는 바는 목적어가 12절의 “여러분”에서 “우리”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를 단순히 2인칭과 1인칭이 대조관계에 있다는 의미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수신인뿐 아니라 저자 자신도 포괄하는 의미로 받아 들여야겠다. 즉, 그분 구원의 손길은 너와 나, 여러분과 우리 할 것 없이 모두를 포괄한다는 뜻이다. “어둠”: 악 또는 죄의 영향력 아래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경향은 쿰란 문헌에서 두드러진다. 동시에 어둠은 세상 영역을 의미한다. 어둠이란 용어만으로도 충분하련만 “어둠의 판세”라고 표현함으로써 세상을 지배하는 악의 세력 내지 악의 영향력을 더욱 강조한다. 탈출의 본보기는 “...로부터...로에로”에서 잘 드러난다. 이같이 대조적인 표현으로 21-22절(“한때는 ...그러나 이제는”)참조. “건져내어”: “건져내다. 구해내다”는 매우 집약적인 동사로서 바오로 친서에서는 물론 바오로 후기 문헌에서도 구원론적 맥락 속에 사용된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역사하심이 출애굽 사건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느님 해방의 손길과 비교된다. 4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주체인 데 반해 13절에서는 아버지가 주제다. “당신 사랑하는 아드님 나라로”: 어둠의 세력이 판치는 현실 분위기를 전제한 말이다. 사랑하는 아들을 거론하는 것은 예수의 세례나 거룩한 변모와 연관성이 깊다고 본다. 나아가 하느님 나라의 양상을 결론짓는 내용으로 이해된다. “아드님 나라로”란 표현에는 2사무 7,12-16에 근거한 나라 관념이 어렴풋이 서려 있다. 구원론적 진술을 위한 그리스도론적 표현이 함축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밖에는 하느님 중심으로 꾸며져 있다. 다시 말해 골로사이서에서 그리스도론적 진술은 14절에 와서 처음 명사적으로 나타난다. “옮겨 주다”는 신약성서에서 유일하게 구원론적 문맥에 등장하는 동사다. 12절에서 말한 감사의 근거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건져내었 ... 아드님 나라로 옮겨 주셨다”는 데 있다. 즉, 감사의 근거는 아버지 안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건은 곧 새로운 출애굽 사건이라고 이해된다. 그리스도 사건은 지금까지 죄의 사슬에 묶여 있던 상태에서 벗어나는 해방, 지금까지 휘말려 있던 악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아주 다른 나라로 옮겨가는 사건이다. 13절의 내용은 20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핵심은 부분적 변화가 아니라 총체적 변화에 인간의 부분적 해방이 아니라 총체저 해방에 있다. 14절 첫 목적어 “속량”의 의미는 둘째 목적어 “죄의 용서”에 의해 더 구체적으로 밝혀진다. 이 구절의 전반부는 에페 1.7과 문자 그대로 똑같다. 이 현상으로 이루어보아 이 표현은 형식화한 문장, 곧 전례양식문으로 이미 사용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분 안에서”, 또는 “그분으로 말미암아”라고 옮길 수 있다. 이 표현에서 그리스도 중심적 진술이 명확히 드러나며 이 경향은 20절까지 지속된다. 이는 본문 내용을 규명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2.4절에 따를 때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리스도 신앙인의 온 실존을 근본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11-13절에서 이 말은 결국 아버지이신 하느님에까지 소급된다. “속량”: 본래 이 말은 전쟁포로를 노예상태에서 해방시킴을 뜻했다. 12절에는 출애굽 사건의 동기인 “해방”의 의미가 배어 있다. 출애 6.6에서도 이같은 어원을 찾아 볼 수 있다. 원초적으로는 땅을 유산으로 물려받음을 뜻하던, 하느님으로부터 선사된 새로운 유산은 그리스도 안에서, 곧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공동체에 선사된다. “죄의 용서”: 앞의 “속량”을 보충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현상은 에페 1.7에서도 발견된다. “죄의 용서”나 주제는 바오로 친서에서는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나 공관복음에서는 자주 발견된다. 이는 초대교회의 복음선포에서 일반화한 주제였다. 특히 루카 24.47에서 죄의 용서는 예수 부활 후 초대교회 복음선포의 주안점이었음이 엿보인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그리스도 사건에서 성취되는 해방의 구현으로 이해되며 이 사건의 배후에는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스도가 어던 분인지는 뒤따라오는 15-20절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진다. “받았습니다”: 우리말은 과거형이지만 그리스어로는 현재형으로서 현재 상태를 포함할 뿐 아니라 종말론적 의미를 지닌다. 구원사건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찬가 이 단락은 본문의 언어와 구조가 색다르다. 저자가 전승에서 물려받아 나름대로 손을 댔을 개연성이 크다. 15절 15절은 12-14절에서 언급된 인간 구원과 죄의 용서에 대한 보충설명으로 이해된다. 인간을 “어둠의 권세에서” 구원하며 인간에게 “죄의 용서”를 베풀 수 있는 분은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아드님 안에서, 아드님을 통하여” 인류에게 죄의 용서를 베푸신다. 그렇다면 “그 아드님은 누구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이 바로 15절이다. “그분은 ...이시다”는 관계대명사로서 앞에 나온 “그분의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지칭한다. 여기서 “그분”은 곧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드님”이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 “모상”은 성서전승에서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다. 종교사적으로는 이집트에서 임금을 신성을 지닌 인물로 형상화하기 위해 쓰던 말로 이해된다. 어떤 형상은 곧 그것이 뿌리를 둔 존재 자체를 반영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2고린 4.4에도 비슷한 표현이 나온다. 그러나 거기서 “모상”은 하느님의 모상을, 그리스도의 하느님께 대한 관계를 뜻하지만, 여기 15절에서의 모상은 하느님께 대한 관계뿐 아니라 모든 믿는 이의 원형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의 믿은이들에 대한 관계를 강조한다. “모든 피조물의 맏이시로다”: 이는 창조신학적 입장에서 특히 지혜문학적 배경을 전제로 해서 보아야 한다. 지혜는 창조세계의 중개자로, 하느님의 형상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사고는 필오에게서도 발견된다. “성서는 고귀하고도 천상적인 지혜를 다양하게 표현해 준다. 이는 지혜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음을 밝혀주기 위해서다. 지혜는 하느님의 원형.시작.바라봄 등으로 불린다. 그러나 여기서 성서는 지혜를 정원의 식물에 대한 설명을 통해 원형의 모상으로, 세상의 지혜로 묘사한다”. 필로는 모세가 자신이 이룩한 공로로 인해 하느님 권능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하느님 권능의 모상이며... 보이지 않는 자연세계의 보이는 모습이다.” 여기서 하느님 모상에 대한 지혜문학적 측면의 이해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16절 16절 전체의 주요 내용은 첫부분과 끝부분이다. 이 구절 전체를 주도하는 동사는 “창조하다”로서 “그분”과 “만물”과 직결되어 있다. 16ㄴ절은 결국 “모든 것”을 더 섬세하게 설명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모든 창조는 그리스도와 직결되어 있으며 특히 그분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내용이 이 구절의 골자다. 이러한 내용은 다음 표현에서 두드러진다: “그분 안에서”,“그분을 통하여”,“그분을 위해”등. 이러한 수사적 나열을 통해 그리스도께로의 총체적 움직임이 매우 강조높게 묘사되어 있다. 바로 그 안에서 “맏이,으뜸”의 내용이 무엇인지가 계시된다, “만물”: 여러 차원에서 이를 설명한다. 즉, 먼저 당시 우주관에 바탕한 반명제들을 통해, 이어서 같은 낱말을 가지고 권능을 지닌 존재들을 나열하는 가운데 “만물”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이로써 창조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분, 창조의 원동력을 행사하는 분이 누구인지 나아가 창조의 목표는 무엇인지가 계시된다. 곧 창조의 원동력도 창조의 목표도 예수 그리스도임이 명백해진다. “창조하다”: 이 동사는 창조행위를 가리키는 전문용어로서 칠십인역. 특히 시편.지혜서.집회서 등에 자주 나온다. 16절에서 수동형으로 두 번 사용되며 두 경우 모두 “만물”이 주어다, 그리스도가 이 모든 것의 존재 이유일 뿐 아니라 창조의 근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창조의 핵심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16ㅂ절은 창조세계가 자신의 목적지인 “그분을 위하여. 그분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고 있음을 역동적으로 보여준다. 이로써 그리스도론적인 표현이 극에 달한다. 이러한 우주론적 묘사는 창조세계의 중심이 그리스도임을 드러낸다. 이로써 16ㅂ절은 그리스도의 모상이 무엇인지 그 속성을 밝히는 임무를 띄고 있다. 17절 “앞서”: 이 전치사는 단순히 시간적 차원뿐 아니라 상황적 측면에서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계시다”: “존재하다”를 뜻하는 동사는 그 뜻을 더 강도높게 표명하는 동사 “존속하다”로 발견된다. 특히 접두사 “함께”와 합성된 동사가 사용됨으로써 “존재하다”라는 앞의 병행구절과 움직임이 같은 내용인데도 더 생동감있게 서술된다. 창조된 만물의 존재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린다. 즉, 창조된 모든 것의 존재 근거는 다른 어느 곳에도 없다. 그것은 다른 어떤 권력 안에서도 발견될 수 없으며 오로지 “그분 안에서”만 발견된다. 이러한 측면은 2,6-8에서 다시 한번 강조된다. 이러한 사상의 이면에는 플라톤의 창조관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분은 먼저 이 모든 기본요소들을 정돈했다. 그러고 나서 이 모든 것들을 합쳐 하나의 생명체로 만들었다. 그 생명체는 곧 모든 생명체를 말한다. 죽어 없어지는 것이든 불사불멸하는 것이든간에 하나로 만들었다”. 18절 18절 첫마디는 앞선 17절 첫마디와 똑같은 말로 시작된다. 이는 양자 사이에 끊을 수 없는 상관관계가 있음을 말해준다. 이로써 “그분은 만물에 앞서 계시다”는 17절 사상이 여기서도 일관성있게 지속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런데도 18절에는 새로운 의미를 담은 표현과 새로운 용어가 등장한다. 이는 곧 새로운 구제를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교회의”: 바로 앞에 나오는 “몸의”를 설명하는 부가어로 보아야 하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소유격으로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15절에 나온 “피조물”이 “교회”라는 개념으로 대치된다. 여기서 교회는 곧 새로운 피조물을 지칭하는 것 같다. 18절에서 새롱누 주제가 등장한다는 말은 다음 두 차원을 고려할 때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직접적으로는 “교회”가 무엇인지가 전면에 드러난다. 간접적으로는 “만물”이 무엇인지가 규정된다. 이는 특히 인격적이며 구원론적인 측면에서 조명된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관은 바오로 신학의 기본사상이다. 그의 교회관은 여러유형의 공동체 모습과 공동체 삶의 다양성 묘사에 잘 드러난다. 그러나 바오로 후에 교회론은 더 구체화한다. 여기서의 특징은 그리스도가 몸인 교회의 머리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18절과 에페 4.15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볼 대 부가적 소유격 “교회의”는 저자가 이미 주어진 찬강에 덧붙인 표현으로 본래찬가에서는 “피조물”에 직결되었던 표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맏이시니”: 이 표현은 이곳을 제외하면 신약성서 전체에서 묵시 1.5에만 나온다. 이는 부활을 전제한 표현이다. 바로 그 점에서 그리스도는 창조된 모든 것의 “맏이.으뜸”위치를 차지한다. 세상 만물의 으뜸 성격을 근거짓는 핵심을 한마디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부활했다는 표현이다. 이는 다시금 “...위하여”라는 동기와 연결된다. 죽은 이들, 곧 죽음을 능가하는 분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능가하는 분임을 표명하는 말이다. “첫째”: 하느님 모상 또는 “만물 가운데 첫째”와 같은 묘사는 골로사이서에서 새롭지 않으며 이해하기도 쉽다. 2.10에도 그와 같은 표현이 나온다. “그분은 하늘의 모든 권력과 권세의 머리이십니다.” 그러나 18ㄱ절에서는 누구나 기대할 수 있는 평범한 표현 “만물의 ...”가 아니라 “몸의 ...”가 등장한다는 사실이 새롭고도 놀랍다. 새로운 표현으로부터 “교회의 머리= 교회의 으뜸”이라는 표현으로 발전한다는 점이다. “교회의 머리”라는 은유가 사용됨이 새롭다. 이로써 창조세계와 관련지어 그리스도께 대해 언급되었던 바가 “교회”에로 전이된다. 이러한 내용상 발전을 다음과 같이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에 앞선 존재다;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한다; 만물은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위해 존재한다. 이 구절은 번역상 난점이 있다. 무엇보다 주어가 무엇인지 가려내는 일이 급선무다. 본문에는 명시되지 않지만 “하느님”을 주어로 보완할 때 큰 문제를 해결된다. “충만함”을 주어로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이 경우 전체 의미가 모호해진다. 19절 “그분 안에서”: “머물다”와 덜어질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다. 2.9도 이 관점에서 이해할 때 무리가 없겠다. “충만함”은 어떤 결함도 용납될 수 없는 하느님께만 실존 가능한 “절대적 충만성”, 곧 “하느님의 온전한 현존”을 가리킨다. 에페 1.23에서의 “충만함”도 이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바오로는 긍정적 의미에서의 “충만한”개념을 다양하게 사용한다. 20절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위해”;이미 우주론적 뜻으로 사용된 말이다. “화해시키셨도다”: 원인과 활동 영역의 관계를 드러내는 “그분을 통하여”로써 그리스도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여시 쓰인 동사 “화해시키다”는 신약성서 전체에 걸쳐 이 20절과 22절: 에페 2.16에만 나오며 다른 고대 문헌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단순히 윤리적 의미에서의 화해만을 뜻하지 않고 더 근본적인 차원의 화해를 일컫는다. 이는 “총체적 일치”를 목표로 하는 표현으로서 그 본연의 의미는 20절 중반부에 가서 “평화를 이룩하시는 가운데”를 통하여 더 명료해진다. 또한 이 표현에는 그리스도가 창조의 중심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스도는 우선적으로 창조의 중심이며 동시에 화해의 중심이다. “십자가의 피”: 희생제물을 일컫는 표현으로서 구약의 번제제물과 상관되는 효현이다. “평화를 이룩하시는 가운데”: 20ㄱ절의 “화해시키다”를 더 선명하게 조명한다. 평화는 하느님과의 티없는 온전한 일치다. 여기서 “이루다, 만들다” 동사는 단순히 무엇을 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을 전제한 창조행위를 지칭하는 말로 이해된다. 이러한 새로운 창조, 곧 화해는 결국 바오로의 가르침에 따를 때 십자가를 통해 성취된다. “그분을 통하여”: 본문비평적으로 볼 때, 이 말이 본래 본문에 들어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일종의 삽입구로 볼 수 있겠다. 이 말이 삽입됨으로써 오히려 문장의 흐름이 부자연스럽거나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이는 화해 실현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이무를 띨뿐이다. 문장의 의미를 더 선명히 밝히려는 의도에서 누가 이차적으로 본문에 첨가한 말로 볼 수 있겠다.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내용은 16ㄴ절을, 표현양식은 16ㄹㅁ절을 연상케 한다. 20절 후반부는 화해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총체적으로 드러낸다. 20절은 “화해시키다”와 “평화를 이룩하다”라는 표현에서 절정에 달하며 바로 그 시절에서 이 찬가는 막을 내린다. 복음 <주님,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39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41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주해 36절 “그분께 식초를 들이대며”는 마르 15, 34-36을 대폭 줄인 것이다. 39절 마르 15.332ㄴ에 의하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자들도 그분을 모욕했다”. 그러나 루카에서는 한 죄수는 예수를 모독한 반면 또 한 죄수는 예수께 구원을 빌었다한다. 42절 파피루스 75호. 바티칸 사본에서는 “당신 나라로 가실 때”라 한다. 그러나 시나이,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는 “당신 나라와 함께 오실 때”라 하는데, 이는 “당신이 왕권을 지니고 재림하실 때”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죄수는 예수께 종말 구원을 빈 것이다. 43절 예수께서는 종말 구원을 앞당겨 죄수에게 “오늘”,“낙원”을 약속하신다. 여기 낙원은 의인이 죽어서 가는 곳이다. 이 낱말도 아마도 여기와 같은 뜻으로 1고린 12.4에 한 번 나오고, 종말 구원의 장소라는 뜻으로 묵시 2.7에 또 한 번 나온다. 43절을 쓰인 대로 풀이하면, 예수님과 죄수는 죽는 순간 복된 곳으로 간다는 뜻이다. 대체로 신약성서에서는 종말 부활을 기대한 반면 죽음과 부활 사이의 운명을 거론하지 않는 법인데, 루카만은 좀 다르다. 그는 16.23에서도 라자로라는 거지가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다는 말을 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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