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5 연중 제34주간 금요일...독서,복음(주해) | |||
---|---|---|---|---|
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11-24 | 조회수251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그들은 저마다 자기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나는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4 나는 또 어좌들을 보았는데, 그 위에 앉은 이들에게 심판할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11 나는 또 크고 흰 어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보았습니다. 15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주해 천년왕국 이제 종말론적 심판의 막바지에 이른다. 이 대목의 주제인 “천년왕국”은 묵시록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가운데 하나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동시에 그 때까지 큰 박해로 살해당했던 순교자들이 모두 죽음에서 일어나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하게 된다, 그 나라는 천년 동안 계속될 것이다. 그 후 악마는 잠시 놓여질 것이고 최후의 전쟁이 있은 다음, 모든 사람의 부활이 있고, 악마는 결국 패배하여 그 추종자들과 함께 불못 속에 던져질 것이다, 이 천년왕국은 그리스도교 배경이 아니라 메시아 시대에 대한 유다적 배경에서 생겨난 것으로 본다, 유다 묵시문학 저서들을 비롯한 유다 문헌들에는 메시아의 통치기간을 각각 40년. 100년. 600년. 1000년. 2000년, 7000년 등으로 말한다. 이 통치기간이 끝나면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고, 이어 “새 하늘과 새 땅”이 조성되어 영속될 것이라 한다, 묵시록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해 21,1에서 언급한다. 1절 “나라”은 일시적 처벌 장소로 여겨진다. 영원한 벌을 받는 곳은 “불과 유황의 못”이라고 한다. 2절 악마의 세력을 감옥에 가둔다는 묘사는 이미 이사 24.22에 나온다. 에녹 1서. 18.12-16에는 타락한 천사를 마지막 심판 때까지 임시로 가두는 장면이 나온다. 3절 천년이 끝나면 사탄이 잠시 풀려나온다는 주제는 7-10절에 다시 나온다. 4절 이 단락에서는 “첫째 부활”이 가져오는 “첫째 심판”에 대해 약술한다. 이 부활은 육신 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순교자들의 영이 죽음과 개인적 심판 다음에 즉시 천상 즐거움에 들어가는 것이다. 저자가 묘사하는 “천년왕국”은 하느님 원수들이 멸망과 함께 마지막 심판 때까지 계속된다. 세상에서 메시아가 한시적으로 통치하리라는 믿음은 위경에 속하는 유다묵시문학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 믿음은 성서에서도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으며 신양성서에도 있다. 이곳에서 “천년”은 아마도 유다계와 그리스도계 문헌들에 나오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이 문헌들에 의하면 세상의 역사는 시편 90.4나 2베드 3.8에 나오는 대로 7천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마지막 일곱째 천년은 창조의 제7일에 해당하는 것으로 “안식”의 천년, 즉 선택된 사람들에게 묵시록의 “천년왕국”은 “시간의 끝”에 따라올 교회의 영광스러운 국면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세상 마지막 날에 부활을 통해 완전한 찬미를 드릴 것을 기대하면서 “이제부터” 복된 사람들이 고대하던 영광에 관한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 예언적 현시가 가져오는 것이 어떠하든, 저자가 기술하는 것은 유다인들이 기대하던 “지상”왕국과 완전히 구별되며, 육체적 즐거움을 누리는 그런 나라를 기대하던 고대 천년왕국과 유다 묵시문학의 환상적 묘사와도 거리가 멀다. 묵시록에서 복된 사람들이 참된 행복이란 그리스도의 천상적 사제직에 동참하는데 있다. 11절 첫 창조물의 소멸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하늘과 땅은 당연히 심판의 대상이며, 그 때문에 없어진다고 말한다, 여기서 재판관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하느님이다. 반면 마태 25,31-46의 “최후심판” 기사에는 “인자”가 심판관으로 나타난다. 12절 유다 전승에는 사람들의 선행과 악행이 천상 책에 기록되어있다가 마지막 심판 때 그 기록대로 보상과 처벌을 받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13절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거슬러 일어나는 반대세력을 의인화하여 말하는 “죽음과 저승”은 묵시록에도 여러 번 나타나며 신약성서의 다른 데도 나온다. 그들은 자기들 속에 있는 죽은 자들을 토해낸 후 곧 멸망해 버린다. 이제는 그것들이 발붙일 곳이 허락되지 않는다. 저승은 죽은 자들의 임시 거주지일 뿐 최후 안식처가 아니다. 최후심판이 있고 나면 저승은 쓸모없으며 다시는 죽음도 없다. 21.1절 구약성서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란 무엇보다도 상징적 의미로 메시아에 의해 선택된 백성의 재건과 개혁을 뜻했다. 그러나 종말론적 배경에서는 아마도 죄와 죽음의 무대인 이 세상에 대한 근본적 개혁의 의미로서, “새로운 창조”를 뜻할 것이다. “전에 있던 하늘은 없어지고 새 하늘이 나타난다. 하늘의 빛은 일곱 배나 밝을 것이며, 그 새로 창조된 것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종말론적 상황에 대해 말하는 신약성서 본문들에서도 무엇이 존재하고 어떠한 상태일지는 여러 가지로 이야기되지만, 결국은 같은 개념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다. 슬픔은 잊혀지고, 죄는 없어지고, 어둠은 사라질 것이며, 시간은 영원으로 바뀔 것이다. 고대 우주관에 의하면 바다는 혼돈이, 암흑의 권세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새로운 창조에서는 이러한 악의 자리가 없다. 이 사고방식은 바빌론의 “티아마트”설화에까지 소급될 수 있는데, 이 바다 신은 바다 속 깊은 곳에 갇혀 있다 한다. 2절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이란 두 가지 구약성서 주제의 종합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종말론적 예루살렘의 실현이요, 다른편으로는 백성들 사이에서 하느님 현존의 표징이었던 천상 하느님 현존의 원형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 두가지 주제는 하느님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또 완성하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여기서 거룩한 도시는 재림 때의 이상적이고 영광스러운 교회를 표상한다. 교회는 거룩한 백성이 모이는 장소라는 의미에서도 예루살렘으로 불릴 수 있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교회가 인간적으로 실현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이 세우고 인도하시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새 예루살렘의 이미지를 도성에서 여인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미 구약 전승에 예루살렘을 여인으로 표현하는 예가 있다. 어린양을 위해 단장한 여인은 화려한 옷과 보석으로 장식한 “큰 창녀”와 대조를 이룬다. 큰 창녀는 세상과 자기 자신에게 자신의 영광을 선포하기에 급급했지만, 여인인 예루살렘은 오직 신랑인 주님만을 위해 살게 된다. 복음 <너희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주해 무화과나무 비유- 종말의 때 21.29-33은 마르 13,28-31을 거의 그대로 옮겨쓴 것이다. 31절 루카에 의하면 “이런 일들”은 종말 직전에 해와 달과 별들이 뒤흔들리는 사건이다. 그리고 인자의 내림과 하느님의 나라 도래는 다같이 종말사건임을 유의하라. 32절 마르 13.32에는 예수님조차 종말의 날과 시간을 모른다는 말이 있는데. 루카는 예수님의 무지에 곤혹을 느낀 나머지 그 구절을 삭제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