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생명수의 강 (묵시22: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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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2-11-25 | 조회수252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공동번역성서
생명수의 강
(묵시22:1-5) 1 그 천사는 또 수정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 양의 옥좌로부터 나와 2 그 도성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양쪽에는 열 두 가지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맺고 그 나뭇잎은 만국 백성을 치료하는 약이 됩니다. 3 이제 그 도성에는 저주받을 일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어린 양의 옥좌가 그 도성 안에 있고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4 그 얼굴을 뵈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하느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 도성에는 밤이 없어서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빛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시간에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바로 어린양의 신부, 하느님의 백성, 교회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번 본문인 요한 묵시록 21장 후반부를 통해서 장차 올 그 나라에서 하느님의 백성들은 찬란하고 아름다운 보석처럼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될 것임을 본 것입니다. 아울러 그 하느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보석 같은 삶을 살아 내야 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에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 은 누구라고 했습니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러면 그 새예루살렘에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요한은 오늘 본문의 묘사를 통해서 ‘교회, 즉 하느님의 백성들의 생명은 바로 생명수의 강이다‘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聖徒들의 생명의 근원은 따로 있다는 것이지요. 이 장면을 구약의 어디에선가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동산 중앙에서 강이 발원하여 동산을 적셨던 곳이 어디입니까? 에덴동산, 그리고 또 한군데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제 그 영원한 나라에서 하느님으로부터 공급되는 ‘바라크’ ‘복’을 받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생명수의 강 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성도들이 이미 이 땅에서 그 ‘복’을 받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땅에 이미 영적으로 그 새 하늘 과 새 땅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미 생명수의 강이 그 속에 흘러 달마다 열두 가지 실과를 맺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장차 올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성도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이미 이 땅을 살고 있는 성도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랬더니 그 여인이 그 샘물을 달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잘 보면 세상 사람들이 요구하는 생명수와 예수님이 주시겠다고 하시는 생명수가 완전히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하는 샘물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달라고 하는 샘물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우물에서 나온 기적 같은 세상의 물이었습니다. 15절을 보면 그 사마리아 여인이 주님께 ‘주여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 그러면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라고 하지요? 이렇게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서 엉뚱한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생명수의 강이 그 속에 흐르는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 앞에서 물동이를 들고 ‘이 물동이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기적 같은 물을 채워주세요‘ 라고 징징대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 세상의 힘인 물동이를 버리고 예수라는 그 참 생명수를 세상에 소개하고 전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세상 것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고 사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생명으로 삼고 사는 자들을 성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영생(신적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요한1:3-4) 3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4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성도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하면 달마다 열두 가지 열매를 맺으며 살 수 있는가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지 그 예수를 이용해서 내 육신의 목을 축이려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열매는 당연히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랑, 기쁨, 평화, 온유, 절제, 자비...)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세계관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보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바보’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진짜 복 받은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 가 손해보고 내가 양보하고 내가 져 주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펜데오‘’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복 있는 자는 온유하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溫柔하다‘라고 번역이 된 ’프라우스‘라는 단어는 단순히 ’성품이 온순하 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프라우스‘라는 단어는 ’프로슈케‘’하느님께 기도하다‘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지금 현재 세상의 환경이나 처지를 바라보지 않고 하느님만 의지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出埃及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골고루 나누어 갖습니다. 그런데 언제 그 땅을 나누었습니까? 가나안을 정복한 뒤에 나누었습니까? 가나안 정복을 시작하기도 전에 미리 나누어 갖습니다. 그 가나안 땅에는 자신들의 대적들이 우굴 거리고 그 대적들은 이미 철 병거를 가진 철기 문명을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거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청동기 문명을 살고 있는 오합지졸 이스라엘이 어떻게 공격도 안 해보고 그 땅을 미리 나누어 가질 수 있었습니까? 자기들의 약하고 초라한 모습을 바라보지 않고 하느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땅에서 약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보여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있고 여러분의 생명을 그 분께 걸고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승리의 주인공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마음이 온유한 자는 땅을 企業으로 받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 번째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는 배부를 것이라고 합니다. 義에 주리고 목이 마르다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는 먹고 마시고 입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을 받고 천국을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욕구가 ‘의’ 로 향해 있습니다. ‘의’라는 것은 관계가 요구하는 것을 열심히 기쁘게 수행하는 것을 ‘의’‘짜다크’라 한다고 했지요? 성도가 하느님의 은혜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복을 받게 되면 그 의에 대한 욕구, 다른 말로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삶이 무엇일까? ‘가 그의 욕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들은 돈, 명예, 권력 같은 세상 적인 욕구를 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 안에 생명수가 흐르고 있는 성도는 그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이웃을 대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역시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가리켜 ’바보‘라고 손가락질을 하겠지요.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절대 평화케 하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분열케 하고 다투게 하는 자가 되지요. 평화케 하는 자들은 그들이 상대방의 아래로 먼저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땅에 서 힘이 듭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지금 이 팔복을 들으시고 ‘그게 뭐가 천국이야. 난 그럴 거면 천국에 안 살래’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지금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천국에서도 여러분이 핍박을 받고 늘 남에게 당하고만 살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곳은 죄가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로 살아가는 것이 죄인들에게 핍박을 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지만 그 삶 속에서 죄인들이 모두 사라지게 되면 거기가 바로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부인하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자기를 비워내는 사람들만 모여 사는 곳이 天國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이 땅에서 그 삶을 훈련하고 가야 하는 것이라고, 그렇기에 복을 받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그 십자가를 통과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때는 내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든 유명하든 그렇지 않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것이 적고, 내가 덜 유명하다는 기준을 내릴 상대방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소유를 가지고 ‘적다, 많다‘라고 판단하는 기준은 모두가 내 옆 사람과 비교해서 내리는 결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더 많이 갖고 더 유명해지려고 하는 그 욕구의 뿌리를 캐고 들어가 보면 결국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이겨서 나의 자존심을 지키고 나를 과시하려는 ‘죄’인 것입니다. 그 것을 세상의 ‘힘의 원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을 받은 새 사람들은 세상 것을 자꾸 포기하고, 양보하고, 져 주면서 그 ‘힘의 원리‘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의 원리를 벗어나서 나 말고 하느님과 내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천국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끊임없이 시험할 것입니다. ‘힘이 최고야, 예수 잘 믿으면 그 힘을 주셔, 그러니 십일조 떼어먹지 말고 열심히 해, 봉사 열심히 해, 집을 팔아서라도 건축 헌금 해봐. 그러면 하느님께서 너에게 몇 배로 그 힘을 불려 주실 거야’ 그건 마귀의 속삭임입니다. 절대 넘어가면 안 됩니다. 성도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성당에 와서 온통 예수를 이용해서 이 땅의 빵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건 성도가 아닙니다. 그걸 우리는 불신자라 부릅니다. 어떤 힘센 초월자의 힘을 빌어서 자신에게 기적처럼 이 세상의 ’빵‘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것 이 세상 사람들의 소원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시험하는 마귀에게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느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잘 보세요. ’나는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 가 아닙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입니다. 그 것은 예수님은 지금 모든 성도들을 ‘대표해서’ 그리고 ‘대신해서’ 시험을 당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전에 한국에 보리 고개가 있을 때에 광에다가 쌀 두어 가마니를 척 쌓아두면 온 식구가 겨울을 날 힘을 얻었습니다. 그 것을 ’양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헬라어는 전자를 ’프롭페‘라고 하고 후자를 ’브로마‘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말 개혁 성경에는 그 두 단어를 혼용해서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그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양식을 주시는 분이시지 음식을 주시기 위해 존재하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물론 음식도 하느님께서 주시지요. 그러나 음식은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길에 우리의 생존을 위해 주어지는 것 이지 그 것이 생의 목적이 될 수 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만나를 ’음식‘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음식을 공급해 주시는 분으로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만나를 음식으로만 보니까 불평 이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애굽에서 부추와 마늘과 고기도 먹었는데 왜 여기서는 맨 날 만나만 먹어야 하나?‘ 그래서 신명기 8장 에서 ’만나를 주신 것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빵’을 위해 살고 오직 ‘빵’을 목적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쫓아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목적으로 이 땅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가는 데에 우리가 생존해야 하기 때문에 ‘빵’이 조금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하느님 앞에 광주리 들고 가서 ‘빵’만을 조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세상의 빵을 주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로 말미암은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의 내용이신 ‘예수’를 힘 삼아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려고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것이 없음으로 인해 슬퍼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이 나에게 없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보다 세상의 다른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우리 의 죄 된 모습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수를 이미 마신 분들입니다. 그 들은 이 세상에서 반드시 십자가를 통과해 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그렇게 비천한 모습으로 구유에 오셨는지 아십니까? 왜 그렇게 못 생긴 모습으로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가 가셨는지 아세요? 예수님은 예수님의 외형을 보고‘난 당신의 백성입니다’라고 따르는 자들이 없도록 하 기 위해서 그렇게 오신 것입니다. 진짜 하느님의 백성들을 가려내기 위해 그런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진짜 하느님의 백성들을 골라 내시기 위해 천국으로 가는 길목에 십자가를 걸림돌로 두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힘과 권력을 쫓는 자들은 모두 그 십자가라는 걸림돌 에 걸려 넘어져 버립니다. 가짜들은 십자가 앞에서 이내 포기합니다. ‘이게 무슨 복이야? 난 안가’ 오직 하느님이 택하신 하느님의 백성들만이 그 십자가를 묵묵히 통과해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힘의 원리에 의해 이기적으로 움직이는 이 세상은 완전히 잘 못된 세상이라는 것을 드러내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오시자마자 세상 힘의 상징인 헤로데 왕의 정체가 잔인하 게 폭로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 아이들까지도 서슴없이 죽여 버리는 그러한 세상의 정체가 예수 앞에서 폭로되는 것 입니다. 아울러 하늘의 왕 노릇 할 사람들은 그렇게 이 세상에서 세상 왕들에게 핍박받고 쫓겨 다니는 모습으로 보여 질 것을 암시하는 것이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재판 자들이 세상의 힘의 원리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다가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것과 대조적으로 등장하여 이 세상의 다스림 의 원리와는 정 반대의 원리로 세상을 다스려서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하실 거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이스라엘의 재판자의 뺨을 치러 오신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미가3:9-11) 1 그러나 애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너는 비록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 보잘 것 없으나 나 대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너에게서 난다. 그의 핏줄을 더듬으면, 까마득한 옛날로 올라 간다. 2 그 연인이 아이를 낳기까지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시리라. 그런 다음 남은 겨레들이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돌아 오면,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교회 지도자가 돈을 보고 축복하고, 돈을 위해 예언을 해 주고, 헌금을 많이 내면 잘 산다고 가르치고, 봉사를 열심히 하면 하느님께서 복을 주셔서 세상에서 잘 산다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바로 그 자들의 뺨을 갈기기 위해 예수를 베들레헴의 구유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 서 죽여 버리셨습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애굽은 지리적 의미의 애굽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곳, 다른 말로 세상 왕이 다스리는 곳을 ‘애굽’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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