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4 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사회 교리 주간)...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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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12-03 | 조회수417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인간 존중과 인권 신장은 복음의 요구다. 그럼에도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짓밟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에 따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82년부터 해마다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로 지내기로 하였다. 교회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엄한 인간이 그에 맞갖게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보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권 주일로 시작하는 대림 제2주간을 2011년부터 ‘사회 교리 주간’으로 지내고 있다. 오늘날 여러 가지 도전에 대응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의 ‘새 복음화’ 노력이 바로 사회 교리의 실천이라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일깨우려는 것이다. 제1독서 <그는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리라.> 3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해하리라. 6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9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 그는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리라.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여 주십니다.>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주해 4절 1마카 12.9 참조. 5,3-4; 8.25 참조. 시편에서 예언된 바와같이 사람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모범은 강한 이들이 약한 이들을 인내있게 포용하도록 격려한다. 5절 2고린 1.3 참조. 직역하면 “서로간의 같은 생각을 주시기를”(12.16 참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의 일치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은 그들 모두를 받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교회일치를 보존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이 지상에서 사신 목적은 세 가지다. 하느님의 성실을 보여주고, 성조들에게 하신 하느님의 약속을 입증하며, 이방인들이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위엄을 찬미하게 하는 것이다. 바오로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일치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서로 일치하며 한마음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칭송하라고 권고한다. 7절 그리스도는 로마의 신자들, 약한 이들과 강한 이들 모두를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으로 만드셨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포용함으로써 그리스도교적 공동체 정신을 보존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느님이 그들 안에서 권능을 행사하신다는 것을 승복하고 사람들에게 이 권능을 증명하게 된다. 8절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표지로 할례를 받았다. 그리스도가 그들을 구원하러 오신 것은 그들의 선택을 입증한다. 이러한 뜻으로 그리스도가 할례받은 이들을 위해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실천하시는 종이 되셨다. 그 목적은 하느님의 진리를 위함인데, 이는 하느님이 그들의 선조들과 맺으신 계약, 그들에게 하신 약속이행에 한결같이 성실하신 분임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뜻한다. 창세 12,1-3; 17,6-8; 미가 7.20; 사도 2.39; 3,25 참조. 유다인들과 이방인들 모두가 하느님의 약속에 참여하기 때문에 서로 일치해야 한다. 9절 하느님은 역설적으로 유다인들의 불신앙을 통해 이방인들도 당신 자비와 구원을 받게 하셨다. 이방인들은 이렇게 구원의 권능을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위엄을 찬미하게 되었다. 그들의 찬미가 9-12절에 서술되어 있다. 시편(LXX) 17.50. 바오로는 이 시편을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하느님을 찬양하도록 초대되었다고 해석한다. 복음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4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7 그러나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10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주해 요한 세례자의 출현 3,1-6은 마르 1,2-6을 거의 그대로 옮겨쓰다시피 한 것이다. 다만 어순은 많이 바꾸었다. 1절 루카 3.1에서는 “티베리오 황제의 치세 십오년에” 요한 세례자가 활약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서기로 환산하면 27~28년경이다. 2절 마르 1.4에 의하면 요한 세례자는 “죄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다”. 그런데 마태오는 이를 고쳐서 “회개하시오. 하늘나라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라고 선포했다 한다. 그 결과 세례자의 선포 내용이 예수님의 선포 내용과 아주 같게 되었다. 그 둘이 외친 내용은 하느님이 통치하실 때가 임박했다는 것, 그러므로 이제까지 하느님을 등지고 살던 인간이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회개의 결단을 내려 마땅하다는 것이다. 마태오는 “죄사함을”(마르 1.4) 삭제했는데, 예수님 홀로 죄를 사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1.21; 26.28). 3절 이사 40.3을 인용하는데, 이사야의 경우에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가 하느님의 오심을 준비한다. 그러나 마태오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한다. 4절 요한은 사막의 유목민처럼 입고 먹었다. 유목민은 낙타 털가죽을 적당히 꿰매어 입고 가죽끈을 만들어 허리에 들렀다. 또한 농사를 짓지 않고 자연에서 우연히 습득한 “메뚜기와 산꿀”을 먹고 살았다. 그런가 하면 북조 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 활약한 예언자 엘리야가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둘렀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그러니 엘리야 예언자와 요한 세례자의 의복이 같은 셈이다. 마르코도 요한을 재림한 엘리야로 여겼고, 마태오는 더욱더 그렇게 여긴 사실을 유의하라. 요한의 회개설교 3,7-10은 예수 어록에서 따온 것이다. 설교 청중이 루카의 경우에는 “군중”이고, 마태오의 경우에는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이다. 루카는 어록을 보존한반면, 마태오는 “군중”을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로 고친 것 같다. 사실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이 짝지어 나오는 사례는 신약성서를 통틀어 다섯 번인데 죄다 마태오복음에만 나온다. 요한 세례자는 하느님이 곧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다는 것, 그러므로 하느님을 등진 인간은 마땅히 그분께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 아브라함의 핏줄을 타고났다 해서 종말 심판을 면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요한이 그리스도를 예고하다 3.11-12는 마르 1,7-8과 어록을 옮겨쓴 것이다. 요한 자신은 하느님 친히 세상을 심판하러 곧 오시리라 예고했을 것이다. 누가 만일 요한이 베푸는 물세례를 거부하면 미구에 하느님은 그를 심판하시리라고 위협했다. 요한은 이를 상징적로 표현하여 하느님은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입니다,... 복더기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입니다”라 했다. 요한 자신이 하느님의 오심을 예고한 것과는 달리, 마르코.어록작가. 마태오 등 그리스도교 작가들은 한결같이 요한 세례자가 하느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요청을 예고했다고 고쳐썼다. 11절 마르 1.7; 루카 3.16; 요한 1,27에서는 “신발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라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마태 3.11에서만은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습니다”라 하는데, 어록의 표현을 옮겨썼으리라, 두 경우 다 종이 주인을 섬기는 도리로 하는 천한 일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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