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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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12-07 | 조회수217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성모 마리아께서는 잉태되신 순간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는 믿음은 초대 교회 때 생겨났다. 여러 차례의 성모님 발현으로 이러한 믿음은 더욱 깊어졌다. 1854년 비오 9세 교황은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우리나라는 이미 1838년 교황청에 서한을 보내 조선교구의 수호자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로 정해 줄 것을 청하였고,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이러한 요청을 허락하였다. 제1독서 <나는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라.> 12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15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 나는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라.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6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주해 3절 2고린 1.3; 1베드 1.3 참조. 이 첫 문장은 14절까지 이어지는 서두 찬양의 주제문이다. 3ㄴ절에 찬양의 이유로 제시된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하셨다”는 내용이 무엇인지는 이 서두 찬양을 끝가지 읽어봐야 알 수 있다. 그 축복의 내용인즉; 선택, 하느님의 아들이 됨, 죄의 용서와 속량, 신비의 계시, 성령의 날인등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하느님의 축복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 점은 이 서두 찬양에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어구가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어구는 옥중서간들을 포함하여 바오로계 문헌에서 160회 이상 나오는데, 에페소서에 비교적 자주, 특히 서두 찬양에 집중적으로 나온다. 저자는 이 어구를 통해 1.3에 말한,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하셨다”는 내용을 전개시킨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은 우리를 선택하셨고, 은혜를 베푸셨으며, 우리를 용서하셨고, 함께 일으켜 하늘에 앉히셨으며, 만물을 총괄하고자 하셨다. 수동태로 표현된 문장들도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우리는 상속자로 뽑혔고,날인을 받았고, 하느님과 가까워졌고, 선행을 하도록 지음받았으며, 속량함을 받았다. 이렇게 저자는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위하여 구원활동을 하셨고, 하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야말로 구원의 중개자시다. 4절 “우리”; 7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았고 속량된 사람들을 의미한다. 5절 “아들이 되는 자격”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본디 종교용어가 아니라 “법적 입양”을 뜻하는 세속 법률용어로서 칠십인역에서도 아직 모르던 단어인데, 신약성서에서는 바오로계 문헌에서만 사용된다. 바오로에게 있어 유다인뿐 아니라 이방인도 “하느님의 아들”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느님을 감히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하느님의 은혜로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사건의 중요한 결과다. “사랑으로”는 5절과 연결시켜 번역하는 것이 옳다. 하느님의 선택과 예정의 동기는 사랑이다. 여기 나오는 주제 “예정”은 항상 긍정적으로 하느님의 구원행위에 관계된다. 이 문장을 근거로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탓도 없이 멸망으로 예정되었다는 식의 결론을 끌어내서는 안된다. 이런 사변이 하느님의 풍요로운 사랑. 은혜. 호의에 대한 감사의 것으로 가득한 이 서두 찬양에 들어설 자리는 없다. 11절 “몫을 받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신약성서에서 이곳에만 나오는데, 구약성서에서 제비뽑기와 관련된 단어로서, 능동태로는 “제비뽑기 하여 정하다”, 수동태로는 “제비뽑기로 선택되다”를 뜻한다. 여기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 안에서 선사하신 구원에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함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12절 13절에 갑자기 나오는 “여러분”에 착안하여 이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이해하고, 여기 12절의 “우리”를 유다인 그리스도인만 지정한다고 보며,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이 주장은 우선 “일찍부터 희망을 걸다”라고 번역된 프로엘피세인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유다인들은 그리스도 전부터 오랫동안 메시아를 대망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3-14(서두 찬양)에서 11절까지의 “우리”는 줄곧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한다. 12절에서 갑자기 이 "우리"를 유다인 그리스도인에게만 한정시키는 것은 무리다. "희망하다“를 뜻하는 엘피제인의 목적어에 전치사 엔을 쓰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따라서 엔크리스토 전치사구는 서두 찬양의 다른 데서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프로엘피제인의 접두사 프로는 반드시 시간적으로 "미리"만 뜻하는 것은 아니며 "희망하다"를 강조한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 희망 자체가 미래에 대한 것이다. "희망을 건"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행동의 결과가 현재까지 지속할 때 사용되는 완료형 분사다.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의 상태"를 갖게 된 그리스도인 일반에 적용하는 것이 옳다. 복음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주해 26절 엘리사벳이 수태한 지 여섯째 달(24절 참조). 나자렛은 구약성서에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지명이고, 예수시대에도 하찮은 마을이었다. 원문에는 “나자렛이라는 동네”대신 “나자렛이라는 도시”. 27절 이스라엘에서는 처녀가 결혼한 다음에도 성관계를 맺지 않은 채 1년 남짓 친정에 눌러살았다. 27절의 “정혼”은 이런 상태를 가리킨다. 한 해쯤 지나고 나면 신랑이 신부를 시집으로 데려가서 비로소 성관계를 맺었다. 28절 “기뻐하소서”는 그리스인들의 인사말. 루카는 그리스사람인지라 이런 인사말을 택했다. 유다인들은 예나 이제나 인사할 때 “평화”를 빈다.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역본에서는 “은총을 받은 이여”대신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29절 마리아는 신비에 접할 때마다 곰곰이 생각하곤 한다. 31절 “예수”는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는 뜻, 마태 1,21에 그 뜻을 풀이했다. 32절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은 그리스인들의 어투. 칠십인역에서도 이방인들만이 그런 표현을 쓴다. 신약성서에는 마르 5.7; 루카 1.32. 35.76; 6.35; 8.28; 사도 7.48; 16.17; 히브 7.1 이렇게 아홉 번 나온다. 여기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은 32-33절을 고려할 때 다윗의 어좌를 물려받는 임금, 곧 메시아라는 뜻이다. 33절 “야곱의 가문”은 이스라엘 백성. 여기서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시고, 2.32에서는 이방인들의 메시아도 되신다. 34절 즈가리야처럼 마리아도 질문을 던지는데 그 자세가 사뭇 다르다. 즈가리야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마리아는 일단 믿으면서 해명을 구할 뿐이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했으나 성관계는 맺지 않고 지내는 처녀였다. 그런 처지에서 수태하리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해명을 구하게 된 것이다. 마리아가 처녀로서 예수를 잉태했다는 이야기는 신약성서를 통틀어 오직 루카 1.34-35와 마태 1,18-25에만 있다. 그러므로 동정녀 잉태 신앙은 일부 지역교회에서 그것도 비교적 늦게 생긴 셈이다. 동정여 잉태 신앙을 두고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우선, 루카 1,34-35와 마태 1,18-25는 쓰인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전통적 해석이다. 위의 단락을 기반으로 하여, 200년경 로마에서 만든 사도신경 전신 신조에, 그리고 이것이 발전하여 6세기에 오늘날처럼 확정된 사도신경에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라는 조항이 생겼는데, 이 조항을 사건사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동정녀 잉태 신앙을 사건사로 보지 않고 의미사로 보는 현대적 해석이 있다. 말하자면, 마리아의 생물학적 이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메시아 지위, 하느님 아들 지위를 의미하는 발설이라는 해석이다. 35절 성령은 하느님의 기운, 여기 “감싸다”는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킨다. 본디 하느님 홀로 “거록하시다” 아울러 하느님의 기운을 입으신 예수님 역시 거룩하시다. 37절 37절은 창세 18.14 인용문 38절 마리아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또한 마리아는 신앙인의 귀감이다(45절).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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