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4 토요일(백) 주님 성탄 대축일 전야 미사...독서,복음(주해) | |||
---|---|---|---|---|
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12-24 | 조회수511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주님께서 너를 마음에 들어 하셨다.> 4 다시는 네가 ‘소박맞은 여인’이라, -. 주님께서 너를 마음에 들어 하셨다. 제2독서 <다윗의 후손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바오로의 증언> 23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주해 16절 회당에서 설교하는 사람은 일어서지 않고 앉아서 한다. 루카는 헬라계 독자들을 위해 바오로를 그리스식 연설가로 묘사한다. 그래서 바오로로 하여금 유다인 회당에서는 불필요한 손짓도 하게 한다. 루카는 여기서 마치 “하느님 경외자들”을 본격적인 이스라엘인들과는 구별되지만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독립된 그룹처럼 소개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명칭을 불리는 그룹이나 계층이 하나의 종교적. 사회적 신분으로 존재했는지는 의심스럽다. 17절 7장의 스테파노 설교에서처럼 구세사가 성조시대로부터 간략하게 소개된다. 구세사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루카 당시에 유행하던 설교 형식이었을 것이다. 여기선느 스테파노의 설교에서보다 이 구세사가 더 짧게 요약되어 있다. 이 요약문에는 칠십인역 어휘가 많이 등장한다. “이스라엘은 하느님 백성”이라는 주제는 루카의 문학적 또는 신학적 목적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에게 하신 약속을 끝가지 지키셨지만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된 평화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 복음은 자연스럽게 이방인들에게로 돌아간다. 22절 사울의 축출에 대해서는 1사무 15,23; 16.1에 기록되어 있다. 다윗의 선택과 관련하여 사용된 둥사 “일으켜 세우다”는 30절에서 예수의 부활에 적용된다. 이는 두 인물 위에 하느님의 능력이 활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시편(LXX)88.21과 1사무 13.14와 이사 44.28을 혼합시킨 본문, 루카는 이처럼 칠십인역 그리스 성서 본문을 자주 혼합하여 인용한다. 23절 이 강조형 대명사는 문장 첫머리에 위치하여 다윗과 예수를 연결짓는데, 사도행전에 자주 나온다. 24절 요한과 예수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 루카 1.17; 3.2-20; 5.33; 7,18-33; 9.7-9; 11.1; 16.16; 20.4-6; 사도 1.5.22; 10.37; 11.16 참조. 루카는 요한의 선교활동이 예수의 선교와 분명히 구별되고 요한이 예수보다 낮은 위치에 있음을 끊임없이 증언한다. 25절 직역; “경주”또는 “경주 장소”. 요한의 말은 루카 3,16-17에서보다 더 예수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복음 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주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족보에서는 예수의 정체를 밝혀 “아브라함의 아들이요 다윗의 아들이신 ... 그리스도”라 했다. 이제 예수의 잉태와 탄생 이야기에서는 어떻게 해서 그분이 다윗의 아들이 되셨는지 그 까닭을 설명한다. 그것은 “다윗의 아들 요셉”이 비록 마리아와 성관계는 맺지 않았지만 그녀와 정혼하고 동거하면서 그녀에게서 태어난 아기 예수를 자기 아들로 삼았기 때문이라 한다. 예수 아기가 비록 요셉의 친아들은 아니지만 합법적인 아들인 까닭에 다윗의 후손인 요셉의 가계를 물려받았다고 한다. 이처럼 마태오는 예수께서 다윗의 후손이 되신 까닭을 밝힐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그분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수태되었다고 한다. 또한 성령으로 수태되신 그분의 실명 예수를 풀이하여 “그는 자기 백성을 그 죄에서 구원할 것입니다”라 하고 또한 그분의 존칭 임마누엘을 풀이하여 “하느님께서 우리과 함께 (계시다)”라 한다. 1,18-25의 예수 탄생 이야기는 모세 탄생 전설, 곧 모세의 아버지 암람. 그의 누이 미리암, 이집트 임금 파라오가 모세 탄생 꿈을 꾸었다는 전설들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루카 1,26-38의 예수 잉태 이야기에도 천사가 나타나지만 요셉에게 나타나지 않고 마리아에게 나타나는 점이 다르다. 18절 옛 이스라엘 관습에 따르면 처녀는 결혼한 다음에도 숫처녀로 그냥 친정에 눌러 살다가 일년쯤 지나 시가로 옮겨간 다음 비로소 성생활을 시작했다. 18절의 “정혼하다” 동사는, 결혼은 했으되 아직 성생활은 하지 않는 그런 상태를 가리킨다. 루카 역시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했을 때의 상태를 두고 “정혼했다”고 한다. 19절 이스라엘에서는 부인이 간음하면 원칙적으로 돌로 쳐죽였다. 잘봐주는 경우라야 남편이 이혼장을 만들고 증인 두 사람과 함께 서명한 다음 부인에게 건내줌으로써 부인을 소박했으니, 이것이 합법적 이혼절차였다. 이제 19절에서는 요셉을 평하여 “의롭다”고 하는데, 유다교에서는 율법을 곧이곧대로 지키는 사람을 의롭다고 했다. 따라서 유다교인 관점에서는 요셉이 공적으로 이혼절차를 밟아 마리아를 소박했어야만 의로운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공적 이혼절차를 포기하고 “남몰래 마리아를 소박하기로 작정한” 요셉은 유다교인들이 보기에는 불의한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요셉을 일컬어 의롭다고 한 것은 그리스도인 관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는 마리아가 어떻게 해서 아긱를 갖게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공적 이혼절차를 밟지 않은 요셉이야말로 의로운 사람이었다. 21절 마태오는 “예수”라는 이름을 나름대로 풀이하여 “그는 자기 백성을 그 죄에서 구원할 것입니다”라 한다. 통속적 어원 풀이로 예수는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이다. 22절 마태오는 구약의 예언이 예수 사건으로 성취되었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이 도식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것이 이른바 성취인용문이다. 성취인용문은 예수 사건 이야기.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하신 말슴이이루어졌다”라는 고정적 도입구, 구약성경 인용문, 이렇게 새 부분으로 짜여 있다. 1,22-23은 마태오복음에 나오는 맨 첫 번 성취인용문이다. 23절 23절은 이사 7.14 인용문이다. 히브리 원문에서는 “젊은 여자가 잉태하여...”라 하는데, 마태오는 칠십인역을 따랐다. 마태오가 보기에 하느님은 예수의 가계를 치밀한 수치로 계획하고 실현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예수로 하여금 성령으로 말미암아 처녀에게서 탄생하겠끔 예정하고 추진하셨다. 그 결과 예수는 단지 다윗의 가계에 속하는 다윗의 아들 메시아일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의 영으로 창조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마태오는 강조한다. 예수께서 실제로 “임마누엘”이라 불린 적은 없다. 그러니 임마누엘은 실명이 아니고 예수의 정체를 드러내는 존칭이다. 히브리어 임마누엘을 풀이하면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본질적으로 숨어 계신 하느님을 우리가 느끼고 듣고 볼 수 있게 해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각과 말씀과 행적 하나하나에 영원하신 분의 뜻이 서려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현신이라 해도 좋겠다. 25절 “그녀와 동침하지 않고 지냈다”는 의역이고, 직역하면 “그녀를 알아보지 않았다”이다. 25ㄱ절ㅇ르 우리말 역문으로 읽으면, 요셉은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다음에는 그녀와 동침했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어.아람어.그리스어에서는 “... 때까지 ...않았다”라 하면 뒷날 그런 일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울러 주석의 상식에 따라 문맥을 고려하여 25ㄱ절을 풀이해야 한다. 앞 문맥을 보면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잉태하고 낳았다는 데 관심을 쏟았을 뿐, 예수 탄생 후에 양친이 성관계를 맺었는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흥미조차 갖지 않았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족보 정리를 할때의 일입니다. 복자 김진후 비오께서 김해김씨 성인공파의 파조인데 종가의 8대조 후손까지는 대를 이어가는 후손들 문제가 없었는데, 종가댁에 9대조를 이어가는 아들이 없어서 아기를 입양하였습니다. 그런데 몇십년 후에 종친회에서 족보 정리를 하는 중 반대하는 사람이 없이 양아들을 족보에 올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정통 핏줄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래서 저도 오늘은 족보가 나오는 긴 복음을 택하지 않고 짧은 복음을 택했습니다. 이에 비추어서 예수님 족보가 나오는 복음과 나오지 않는 복음은 어떤가를 고민하며 우리의 족보문제를 어떨까를 생각해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