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8 수요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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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12-27 | 조회수216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헤로데는 권력을 유지하려고 자신의 정적들을 살해하는 잔인한 임금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탄생 무렵 왕권에 위협을 느껴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두 죽여 버렸다. 이때 억울하게 죽은 아기들의 희생을 교회는 오래전부터 순교로 이해하고 기억해 오다가 중세 이후에는 성대한 축일로 지내고 있다. 이들이 아기 예수님을 위하여 죄 없는 가운데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제1독서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2,1 나의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주해 하느님은 빛이시다 이 단락에선 영지주의 이단자들의 윤리적 오류를 거론한다. 구체적으로 그들이 즐겨 입에 담는 세 가지 표어를 인용하면서 하나하나 반박한다. 이단자들은 “우리는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다”. “우리는 죄가 없다”.“우리는 죄을 짓지 않았다”우쭐대며 영지주의자들은 자기네야말로 하느님과 통하는 까닭에 현세를, 현세의 모든 규범을 훌쩍 뛰어넘은 도사들마냥 처신하여 저런 표어들을 지껄였다. 후대 영지주의자들이 애용한 필립보 복음서 110항에 저들의 사고방식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진리의 영지를 터득한 사람은 자유롭다. 자유인은 죄를 짓지 않는다. 왜냐하면 죄를 짓는 사람은 죄에 사로잡힌 노예이기 때문이다. ... 죄를 지울 수 없는 이들을 자유인들이라고 한다. 죄를 지을 수 없는 이들로 말하면 진리를 깨쳐 마음을 드높이게 된다. 진리를 깨치면 자유롭게 되며 어떤곳보다도 드높게 올라가게 마련이다” 짐짓 초탈한 양 형제애 계명을 저버리는 영지주의자들을, 또한 그들의 꾐에 빠지는 그리스도인들을 필자는 이렇게 혹평한다: “어둠 안에서 거닌다. 거짓말을 한다. 진리를 행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을 속인다. 우리 안에 진리가 없다.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든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지 않다.” 반대로 형제애를 실천하는 이들을 두고 “빛 안에서 거닌다. 서로 친교를 나누다. 죄사함을 받는다”고 한다. 5절 “소식”.“진리”. “하느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들려준 계시다. 요한복음에서는 초월자인 말씀 또는 지상의 예수를 빛이라 한 데 비해, 요한 1서에선 “하느님은 빛이시다”라고 한다. 이는 “하느님은 영이시다”와 같은 계열의, 하느님에 대한 진술이다. 이는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하느님의 처사를 체험한 진술이라는 게 신학학계의 통설이다. 사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진술을 살펴보면, 언감생신 하느님의 본질을 직관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사실과 우리 죄 때문에 속죄의 제물로 삼으신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말이다. 요컨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예수를 통해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뜻이요,“하느님은 영이시다”라는 말은 예수를 통해 성령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빛이시다”라는 말은 예수를 통해 빛을 비추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구체적으로,예수를 거쳐 계시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문맥을 고려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건데, 예수를 거쳐 사랑을 계시하시는 분이시라는 뜻이다. 빛과 어둠의 대조는 쿰란 수도자들이 즐겼다. 7절 7ㄷ절에는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속죄코자 죽으셨다는 대속신앙이 들어 있다. 대속신앙은 매우 오래된 신앙이다. 바오로도 이 신앙을 톡톡히 물려받았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비극적 죽음을 대속사로 해석한 데는, 자신은 전혀 작죄한 적이 없지만 온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속죄코자 엄청난 고난을 겪은 저 신비스런 인물 “야훼의 종”에게서 결정적 영향을 받았다.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는 데는 “피”가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는데, 이는 소죄제사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속죄제사를 드릴 때면 으레 제관이 희생동물의 피를 받아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에다 뿌리고 또한 마당 제단 네 귀퉁이에도 부렸다. 피로써 죄사함을 받는다는 사고는 다음 두 단락에 환히 드러난다. 레위 17.11: “생물의 목숨은 그 피에 있다. 그 피는 너희 자신의 죄를 벗는 제물로서 제단에 바치라고 네가 너희에게 준 것이다, 이 피야말로 생명을 쏟아 죄를 벗겨 주기 때문이다. 히브 9.22: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써 깨끗해집니다. 또한 피흘림 없이는 (죄)사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해석학적 성찰: 십자가에서 쏟은 피 그 자체가 대속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니다. 예수의 비극적 죽음 그 자체가 대속 능력을 지닌 것도 아니다. 피와 죽음 그 자체가 대속 능력을 지닌 것도 아니다. 피와 죽음 그 자체는 큰 가치이기는 고사하고 처참한 역가치다. 골고타 형장에서 값진 게 있다면 그것은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는 예수의 자세다. 하느님에 대한 신념을 고수한 지조, 하느님의 뜻을 앞세운 순종, 제자들과 이스라엘 백성을 끝까지 얼싸안은 사랑이 값진 것이다. 요한계 문헌에서는 죄사함을 다양하게 서술한다. 깨끗하게 하다: 1요한 1.7.9 깨끗한: 요한 13,10-11 용서하다: 요한 20.23; 1요한 1.9;2.12 치우다: 요한 1.29; 1요한 3.5 멸하다: 1요한 3.8 속죄 제물: 1요한 2.2.; 4.10 9절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든다”는 말에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우리 죄 때문에 속죄의 제물로 보내신” 산것이 전제되어 있다. 우리의 변호자이신 그리스도 2,1-6.7-11에서는 영지주의자들의 윤리적 오류를 나무란다. 앎 다르고 삶 다른 지행 불일치를 탓한다. 사실 저들은 “하느님을 알고 있다”.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다”. “빛 속에 있다”고 뽐내면서도 하느님의 계명.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처럼 살지 않았다. 적확히, 형제애를 실천하지 않았다. 2장 1절 “나의 어린 자녀 여러분”은 정이 듬북 담긴 호칭으로서 필자는 요한계 여러 교회 교우들을 그렇게 통칭했다. 그리스어로는 테크니아, 파이디아 두 가지 낱말을 구사하나 뜻은 매한가지다. “변호자”의 그리스어 파라크레토스는 변호자. 중보자. 위로자. 훈계자 등으로 옮길 수 있는 다의적 명사다.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을 1요한 2.1에서는 예수를 뜻한다. 2절 1.7 주석 참조 복음 <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17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주해 이집트로 피신하시다 그 옛날 이집트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영도아래 이집트를 탈출한 출애굽사건이 있었다. 이제 아기 예수도 이집트로 피신해 살다가 나자렛 마을로 옮겨감으로써 출애굽사건을 몸소 겪으신다. 이처럼 아기 예수가 처음에는 이집트에서, 나중에는 나자렛에서 자라신 것은 하느님의 경륜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라 하여 마태오는 성취인용문을 두 차례 만든다. 15절 헤로데 대왕은 기원전 4년 예리고에서 병사했다. 처녀 잉태. 베들레헴에서의 탄생에 대한 성취인용문에 이어, 이제는 이집트에서의 구출에 대한 성취인용문이 나온다.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는 말씀은 호세 11.1의 경우, 하느님이 당신 아들인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기적적으로 구출하셨다는 뜻이다. 마태오의 문맥에서는 하느님이 당신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이집트에서 나자렛으로 옮겨살게 하셨다는 뜻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란 존칭이 2.15의 성취인용문에 처음으로 나오는 점에 유의하라. 17절 18절은 마태오의 네 번째 성취인용문으로서 예레 31.15르 옮겨쓴 것이다. 라헬은 언니 레아와 더불어 야곱의 아내였는데, 요셉과 벤냐민을 낳았다. 베냐민을 낳을 때 겪은 산고 후유증으로 그만 목숨을 잃고 예루살렘에서 북방으로 8키로미터 떨어진 라마에 묻혔다. 가나안 땅 점령 때무터 바빌론 유배 다음까지, 남부 왕조 유다가 신바빌로니아 왕국에 패망하여 기원전 597년과 587년에 무수한 유다인이 메소포타미아로 끌려갈 때 라마 주변에 살던 베냐민 부족도 포로로 잡혀갔다. 이 때문에 라헬의 무덤에서 구슬픈 곡소리가 들린다고 예레미야 예언자는 읋었다. 그런데 라헬이 예루살렘 남쪽으로 8키로미터 떨어진 베들레헴 근처에서 죽고 묻혔다는 설도 전해왔다. 곧, 예레 31.15의 예언이 실현되어, 헤로데가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학살하자 그 베들레헴에 묻힌 라헬이 통곡했다고 풀이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낙태는 죄인가 아닌가도 생각해 봅시다. 사람이 태어났다는게 언제부터냐? 심장이 박동할때냐, 분만의 진통있을때냐. 신체의 일부가 나왔을때냐, 머리가 나왔을때냐, 전부 나왔을때냐 등이 있습니다. 어머니에게서 독립되었을때를 말하는게 태어남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제부터는 나이를 말할때 엄마의 뱃속에서 10개월간 있은 것은 포함을 하지 않는 만나이로 한다고 합니다. 형법에선 분만의 진통이 있을때를 태어났다고 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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