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9 목요일 성탄 팔일 축제 제5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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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12-28 | 조회수280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릅니다.> 6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9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주해 5절 “하느님의 사랑”이란 표현은 요한 1서에 여섯 차례 나온다. 이는 주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2.5의 경우,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뜻한다고 보는 설이 있는가 하면,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두 설을 합쳐서,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주고 받는 사랑이라고 보는 설, 곧 단순히 인간적인 사랑과는 질적으로 다른 “신적 사랑”이라고 보는 제3설도 있다. 그럼 어느 설을 따른다? 표현과 내용에 있어 2.5와 가장 밀접한 4.12를 눈여겨보면, 2.5에 나오는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2.5를 윤색하면 다음과 같다. 이런 관점에서 2.5를 윤색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면 하느님이 먼저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결실(완전)을 맺게 된다. 본디 사랑은 받고 주는 것, 교호작용으로 완성되는 것이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형제애를 실천하는 것이요, 형제애를 실천하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6절 5ㄷ절의 “하느님 안에 있음”과 6ㄱ절의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음”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내밀한 관계를 가리킨다. 쉬운 표상으로, 보면 되겠다. 동서고금의 신비가들이 흔히 말하는 신인합일(神人合一)을 뜻하지 않고 내밀한 친교를 뜻한다. “...안에 머물러 있음”은 요한 1서에 열네 번, 요한복음에 열 번 나오는데 용법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인이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음: 1요한 2.6; 3.24; 4.13; 16 그리스도인인 예수 안에 머물러 있음: 1요한 2.27.28;3.6; 참조; 요한 6.56;15.4.5.6.7 그리스도인이 예수와 아버지 안에 머물러 있음: 1요한 2.24 하느님이 그리스도인 안에 머물러 있음: 1요한 3.24; 4.12.13.15.16 예수께서 그리스도인 안에 머물러 있음: 요한 6.56;15.4.5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 머물러 있음: 요한 14.10 “예수께서 거니신 것처럼 그도 그렇게 거닐어야 합니다”의 취지인즉, 예수의 역사적 생애가 그리스도인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삶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사상 또는 이 사상의 변조가 2.27;3.3.7;4.17에 있다. 바오로와 바오로 학파의 경우, 같은 사상이 1고린 11.1; 로마 15.2-7;에페 5.1-2에 나온다. 7절 “사랑하는 여러분” 호칭은 3.2.21;4.1.7.11에도 나온다. 8절 예수 친히 제자들에게 형제애를 명하면서 “새로운 계명”이라고 하셨다. “나는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줍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되 예수께서 자기네를 사랑하신 것처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처신을 본보기로 삼을 일이다. 그럼 예수께서는 어떻게 처신하셨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최후만찬에 앞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그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으셨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식으로 형제애를 실천하여 마땅하다. 예수식, 이 점이 “새로운”것이다. 8ㄴ절을 직역하면 “그것은 그분 안에. 그리고 여러분 안에 참됩니다”. 예수께서는 새로운 계명을 이미 실천하셨고 요한계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실천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복음 <그리스도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십니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주해 정결례-속량 22ㄱ.24절에서는 정결법을. 22ㄴ-23절에서는 속량법을 다룬다. 여기 정결법은 다음과 같다. 남아를 낳은 산부는 40일간, 여아를 낳은 산부는 80일간 불결한 것으로 여겼다. 남아의 산모는 40일, 여아의 산모는 80일이 지난 다음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일년생 어린양 한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를 제물로 바쳐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만 다시 정결하게 되는 것으로 여겼다. 가세가 가난한 때는 제물로 비둘기 한 쌍만 바쳐도 되었다. 이를 빈자의 제물이라 하는데 마리아도 그렇게 했다. 출산으로 말미암아 남편이 부정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요셉은 정결례를 치를 필요가 전연 없었는데도 그도 함께 예루살렘에 가서 그 예를 행했다는 식으로 말한다. 맏아들을 속량할 때 부모나 아기가 성전에 가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그들이 함께 예루살렘에 갔다는 것은 엘카나와 한나가 어린 자식 사무엘을 실로 성전에 바쳤다는 이야기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23절 출애 13.2.12.15. 24절 레위 12.8. 25절 즈가리야와 아리마테아의 요셉과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처럼 시므온도 의로웠다고 한다. 여기 “의롭고 경건하다”는 다같이 율법을 잘 지킨다는 뜻이다. 위인 탄생에는 흔히 시므온 같은 사람이 나타나 아기의 장래를 예언하는 법. 불교의 원시 경전 숫다니파아타를 보면, 석존이 탄생하자 아시타라는 선인이 나타나 아기를 안고 샤아카 족에게 이렇게 예언했다 한다: “이 왕자님은 정각의 절정에 이를 것입니다. 이분은 비할 바 없이 훌륭한 청정을 보시고,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불쌍히 생각하는 까닭에 법륜을 돌릴 것입니다. 그의 청정한 뜻과 행동이 널리 퍼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의 제 여명은 중도에 저에게 죽음이 찾아 올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위로받기를”은 직역하면 “이스라엘의 위로를”인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뜻한다. 26절 “주님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아라는 뜻이다. 29절 루카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부르던 노래 세 편을 1,46-55,68-79;2.14에 옮겨실은 바 있다. 이 노래들은 본디 예수님의 구원사건을, 특히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노래한 것 같은데, 루카는 마치 마리아가 예수 잉태를 노래한 양, 즈가리야가 요한 출생을 노래한 양, 천사들의 예수 탄생을 노래한 양으로 꾸몇다. 이제 29-32절에 또 한편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이 노래의 용어.문체.보편적 구원사상은 제2 이사야서와 매우 비슷하다. 이 노래의 출처를 정확히 밝히기란 어렵다. 다만, 예수님의 구원사건을 두고 민족적 자부심을 지닌 교회(“당신 이스라엘에게는 영광”),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복음을 전한 교회(“뭇백성 앞에 마련하신”구원.“이방민족들에게는 계시하는 빛”)에서 만들어 부른 노래라 하겠다. 아마도 해외 유다인 그리스도교계의 노래였으리라. ”주재자“은 그리스어 데스포테스를 번역한 것인데 이는 생사 대권까지 쥔 절대 지배자라는 뜻이다. 29절; 사도 4.24; 묵시 6.10에서는 하느님을, 2베드 2.1; 유다4에서는 예수님을 그렇게 부른다. ”풀어 주다“는 쉬게 하다. 죽게 하다. 두 가지 뜻이 있다. 해외 유다인 그리스도교계에서 부른 노래에서는 쉬게하다는 뜻이었으리라. 즉,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구원사건을 학수고대하느라 몹시 긴장한 유다인들에게 그 일을 이룩해 주시어 이제 쉬게 하신다는 것이다. 마치 주인이 수직 임무를 마친 종을 쉬게 하듯, 그러나 현재의 문맥에서는 시므온이 자기 심정을 토로한 셈이다. 늘그막에 예수님을 뵈었으니 이제 편히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30절 “당신의 구원”. 곧 하느님의 구원은 해외 유다인 노래에서는 예수님의 구원사건을 읊었으나, 현재의 문맥에서는 예수님 자신을 뜻한다. 31절 이방인들도 구원의 혜택을 입는다는 보편적 구원관이 루카복음에는 여기 31-32절에 처음으로 명백히 나온다. 34절 시므온의 예언은 유다인들 가운데 더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대부분은 배척한 역사적 체험을 참작하여 루카가 창작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 유다인들은 구원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을 멸망할 것이다. 후자가 전자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배척당하는 표징”이 되셨다. 사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암시하는 상징이셨다. 불행히도 유다인들 절대다수는 연약한 상징만 보았지 상징의 크나큰 뜻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35절 마리아가 혹독한 고통을 겪는 까닭은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여 멸망을 자초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숨은 생각, 곧 믿지 않는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36절 예언자 시므온에 이어 예언녀 안나가 나오는데 루카는 종종 남녀를 차례로 등장시키곤 한다. 37절 1세기에는 교회에서 공인한 과부단이 있었는데, 루카는 안나의 삶을 그 과부들의 귀감으로 제시한 것 같다. 과부 된 지 여든네 해일 수도 있고 처녀생활, 결혼생활, 과부생활을 다 합쳐 여든네 해일 수도 있다. 38절 직역하면 “예루살렘의 속량을”. 이는 “이스라엘의 위로”와 같이 메시아의 구원을 뜻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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