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30 금요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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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12-29 | 조회수325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은 나자렛의 성가정을 기억하며 이를 본받고자 하는 축일이다. 1921년 이 축일이 처음 정해질 때에는 ‘주님 공현 대축일’ 다음 첫 주일이었으나, 1969년 전례력을 개정하면서 ‘성탄 팔일 축제’ 내 주일(주일이 없으면 12월 30일)로 옮겼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2001년부터 해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부터 한 주간을 ‘가정 성화 주간’으로 지내고 있다. 가족 구성원이 모두 가정 공동체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가운데 사랑이 넘치는 보금자리로 가꾸어 나가게 하려는 것이다. 제1독서 15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17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20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주해 새 사람의 삶 12절 골로사이서 수신인들의 정체가 밝혀진다.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아 세례를 통해 새로 태어나서 거룩하게 되었고 사랑받는 이들이다. 이 표현 속에 믿는 이들은 세례로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존재론적 측면에서 “그리스도인임”과 동시에 아직 완성을 향해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실존적 측면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어감”의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거룩한 이들” 안에는 교회론적 사고가 함축되어 있으며 그 이면에는 유다교 선택사상이 스며들어 있다. “자비로운 동정심, 친절, 겸손, 온유, 인내”: 일종의 덕행목록이다. 이웃과 더불어 평화를 이루는 삶을 위한 덕행들이다. “입으십시오”: 10절의 “... 입으십시오”를 연상시킨다. 13절 “용서하십시오”: 2.13의 “용서하셨습니다”를 연상시킨다. 직역은 “완전함”. 14절 사랑을 완전성에 도달하는 덕목으로 꼽는다. 사람은 사랑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완덕으로 나아간다. 15절 이어지는 권고는 3인칭 명령형이며 15절과 16ㄱ절이 병행을 이룬다. 여기 2격 “그리스도의”의 주체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평화와 말씀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브라뷰오(“다스리다. 지배하다) 동사는 신약성서에서 이곳에만 한 번 나온다. 본디 “경기 때 심판을 보다, 기본 계획이나 방향을 제시하다. 결정하다, 일끌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평화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표명하는 근본 개념이며 그 표제로 이행된다. 교회론적 표현이다. 곧, 개별적 수덕의 길을 제시하지 않고 “한 몸”인 그리스도의 몸과 일치하기를 강조한다. 저자는 “한 몸”이란 표현을 통해 앞서 12.14절에서 제시한 근본적 덕행의 길을 걷도록 종용한다. 짧은 골로사이서에서 네 차례나 “감사하라”고 말한다. 이같이 “감사”에 큰 의미를 두었다. 그리스도인의 감사 의무는 구원사건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비롯된다. 세례받은 이가 자신이 받은 은총에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16절 이 구절은 분사구문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같은 사례는 골로사이서에서 자주 발견된다. ”그리스도의 말씀“: 신약성서 전체에서 이것에만 발견되는 표현이다. 1,5에 나오는 “진리의 말씀, 복음”이 그 의미 파악에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면에는 전례 거행이 자리잡고 있다 하겠다. 16절 전체의 표현을 보면 공동체의 전례 거행을 연상하게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말씀”은 전례적으로 선포된 말씀으로 이해된다. 동사 “머물다”는 신약성서에서 모두 여섯 번, 골로사이서에서는 단 한 번 이 구절이 나온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믿는 이들 안에 다양한 형태로 또 지속적으로 현존하도록 힘쓰기를 촉구한다. 여기서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지혜, 곧 그리스도 사건안에서 선사되는 지혜다. “서로”는 공동체 구성원끼리 믿음을 더욱 심화시키는 상호관계를 말한다. 저자는 자신이 선포한 복음을 이제 독자들로 하여금 서로 가르치고 서로 충고하기를 권한다. “마음을 다해”: 직역하면 “마음들로”, “마음들 안에서”,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그분 안에 뿌리박은 마음이며 그분의 영인 성령으로부터 인도되는 마음이다. 찬미의 목표와 대상은 하느님이다. 17절 17절은 전례문인데, 골자는 후반부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이들의 모든 행위를 결정짓는 근본 잣대다. 아버지로서의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근거는 그리스도 자신 내지 그리스도 사건이다. 1,12-14에서 저자는 신앙인과 그리스도에 대해 하느님이 왜 도 어떻게 아버지가 되시는지 그 상관관계를 밝혔다. 18절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명백한 가르침이다. 이같이 아내에게는 강하던 표현이 남편에게는 약화하여 “아내를 사랑하라”로 바뀐다. 그러나 “종속시키다”의 중간태롤 사용된 “순종하다”가 신약성에서 단순히 누구를 종속시키다는 뜻 외에 질서유지를 위해 “서로 병렬싵키다. 서로 종속되다”는 의미로도 사용됨에 유의해야 한다. 특히 “주님 안에서 마땅히 그래야 하듯이”를 감안할 때, 강제로 누구를 굴복시킨다기보다는 “서로 종속되다”는 뜻일 것이다. 19절 사회생활 질서 목록이다. 특히 한 가정 안에서 각자가 지켜야 할 질서를 제세한다. 이같은 사고방식은 본디 엄격한 금욕주의에 바탕을 둔 스토아 철학에 뿌리가 있다. 그 배경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론에서는 “주인과 종, 신랑과 신부, 아버지와 자녀” 등 여섯 계층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늘날 많은 학자는 이 단락을 일종의 “격언”으로서 사회학적 차원에서 가정의 일치를 도모하고자 하는 내용으로 본다. 20절 20절은 자녀가 부모에게 다당히 드려야 할 공경의 의무를, 21절은 아버지가 자녀에게 배려해야 할 바를 제시한다. 그 모두가 “주님께 맞갖은 일”이기 때문이다. 가정질서의 의무가 그리스도중심 사상 안에 묘사된다. 복음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14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20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22 그러나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주해 이집트로 피신하시다 이 옛날 이집트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에 모세의 영도아래 이집트를 탈출한 출애굽사건이 있었다. 이제 아기 예수도 이집트로 피신해 살다가 나자렛 마을로 옮겨감으로써 출애굽사건을 몸소 겪으신다. 이처럼 아기 예수가 처음에는 이집트에서, 나중에는 나자렛에서 자라신 것은 하느님의 경륜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라 하여 마태오는 성취인용문을 두 차례 만든다(2,15.23). 15절 헤로데 대왕은 기원전 4년 예리고에서 병사했다. 처녀 잉태,베들레헴에서의 탄생에 대한 성취인용문에 이어, 이제는 이집트에서의 구출에 대한 성취인용문이 나온다.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는 말씀은 호세 11,1의 경우, 하느님이 당신 아들인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기적적으로 구출하셨다는 뜻이다. 마태오의 문맥에서는 하느님이 당신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이집트에서 나자렛으로 옮겨살게 하셨다는 뜻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란 존칭이 2.15의 성취인용문에 처음으로 나오는 점에 유의하라. 23절 마태오복음의 다섯 번째 성취인용문, 실은 구약성경 또는 구약외경 어디에도 그런 문구가 없다. 그리스 원전에서는 “그는 나조라이오스라 불리리라”고 한다. 나조라이오스는 우선 “나자렛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나 부차적으로는 나지르를 뜻할 수도 있다. 자지르란 적어도 30일 이상 삭발하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으며 시체를 가까이 하지 않기로 서원한 사람이다. 구약의 대표적인 나지르는 삼손, 마지막으로, 나조라이오스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뿌리에서 돋아난 “새싹”, 곧 메시아를 가리킬 수도 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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