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31 토요일 (백) 성탄 팔일 축제 제7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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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12-30 | 조회수212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18-21 21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주해 반(反)그리스도 –거짓말쟁이 2,18-29에선 이단자의 정체와 참 그리스도인의 정체를 상론한다. 이단자들은 요한계 교회에서 생겨나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곧 하느님의 아들임을 부인한다. 이와 달리 참 그리스도인들은 기름부음 받아, 즉 성령을 받아 올바로 안다. 진리를 안다. 진리의 내용인즉, 교회 초창기부터 익힌 대로 아버지와 아들을 고백하고 모시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필자가 이단자와 참 그리스도인의 정체를 기술할 때 유다교 묵시문학,또한 그로부터 생겨난 그리스도교 묵시문학의 영향을 받아 자기가 사는 시대를 종말의 직전의 난세로 보았다. 묵시문학에 따르면, 종말 직전 난세에는 감히 하느님을 거스르는 흉악무도한 적대자가 나타나게 마련이다. 요한계 교회에서는 이 적대자를 일컬어 반그리스도이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이단자(들)을 뜻한다. “반그리스도”는 신,구약 성경, 중간사 문헌, 미드라쉬, 탈무드 등 어느 문헌에도 나오지 않는 낱말로서 요한계 교회들에서는 처음으로 만든 신조어였을 것이다. 비요한계 교회들에서는 하느님의 적대자를 일컬어 “황폐의 흉물”,“거짓 그리스도, 거짓 예언자,“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 또는 “무법자”라고도 했다(2데살 2.8). 20절 20절 “그러나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으니, 여러분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중 20ㄴ절의 경우 시나이, 바티칸 사본에선 ”여러분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로 되어 있으나, 알렉산드리아 사본과 여러 소문자 사본에선 ”여러분은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한다. “기름부음” 명사는 신약성경을 통틀어 오직 요한 1서에서만 세 번 나온다. “기름부음”은 성경을 가리킨다고 보는 게 중론이다. 성령보다 하느님의 말씀 또는 가르침으로 보는 소수의견도 있고, 성령과 말씀을 합쳐 보는 제3설도 있다. 중론에 따라 “기름부음”이 성령을 가리킨다고 본다면 성령을 보내시는 “거룩하신 분”은 누구일까? 예수라고 보는 통설이 있는가 하면, 하느님이라고 보는 소수견해도 있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거록하신 분으로부터 기름부음 받아”, 곧 하느님으로부터 또는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안다. 무엇을? “진리를 안다”(21절). 여기 진리는 요한계 교회가 초기부터 전해받은 예수 전승이다. 복음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주해 1절 창세 1.1과 같은 표현이지만 의미는 다르다. 창세 1.1에서는 창조행위의 시간적 시작을 뜻하나 여기서는 시간을 초월한 영원 속의 신적 실재를 뜻한다. 육화한 “말씀”의 선재성, 곧 천지창조 전의 실존을 표현한다. “말씀”은 한 인격체로서 쓰이는 하느님의 말씀이나 예수의 말씀과 구별되는 개념이다. 즉,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동일시됨으로써 새로운 개념으로 탈바꿈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전인격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말씀”은 그리스도론적 칭호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말씀”은 창조되지 않고 이미 영원 속에 절대적으로 실존해 계셨다는 뜻이다. 이 과거형은 선재한 그리스도를 고백한 시점에서 연유된 표현형에 불과하다. 이와 비슷한 표현법을 8.58에서도 볼 수 있다. 하느님과 “말씀”의 위격적 일치와 결속관계를 뜻한다, 이 관계는 예수 자신의 입을 통해서도 언급된다. 이 관계는 또한 하느님의 실존에 참여한 “말씀”의 영광을 시사한다. 즉, “말씀”은 영원 속에 실재했을 뿐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렸다는 것이다. “말씀”의 이 영광은 예수의 기도 가운데도 언급된다. “말씀”의 신적 본질을 언급한다. “말씀”의 선재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강조한다, “말씀”은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계시기에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 육화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지상활동은 바로 이 본성에 근거한다. 2절 1절의 내용을 반복한 것으로서 문맥상 없어도 아무런 하자가 없을 구절이다. 저자가 가필한 것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지상에서 계시와 구원 활동을 펼친 그리스도의 신원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3절 “말씀”이 하느님의 창조행위에 적극 동참했음을 뜻한다. 창조에 있어서 “말씀”의 유일무이한 역할과 모든 창조물의 가치를 강조한다. 4절 “그것(생겨난 것) 안에 그분은 생명이셨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의미상 큰 차이는 없으나 문법적으로는 이 번역이 더 적절하다. 이런 맥락 속에서 3ㄴ절과 4ㄱ절은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것, 그것 안에 그분은 생명이셨다”라고 번역된다. 하지만 위 본문의 문맥상 매끄럽고 분명하다는 장점이 있다. 창조행위에 동참한 “말씀”은 또한 창조된 모든 것에 대해서도 “생명”을 지닌다. 즉, 모든 것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생겨났을 뿐 아니라 그 실존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지속된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분이 배척되는 곳에는 죽음만 있을 뿐이다. “말씀”안에 있는 “생명”이 “사람들의 빛”으로 언급됨으로써 그 생명의 의미가 더욱 구체화한다. 즉, “생명”과 “빛”은 서로 함께 결속되어 있고, “생명”은 사람들을 위한 “빛”의 의미를 지닌다. “말씀”은 사람들에게 “생명”이요 “빛”으로서 세상 창조 때부터 인간세계와 관계를 가진 것이다. 이 의미가 9절에서 다시 강조된다. 예수도 자신을 “세상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말씀”은 창조와 더불어 생명의 원천이요 빛을 주며, “생명”은 인간을 위한 빛이고, “빛”은 인간에게 생명의 힘이다. “말씀”은 창조뿐 아니라 인간 구원에도 참여하시며, 인간 구원은 창조 목적이다. 5절 “어둠”은 하느님을 거부하고 등진 인간세계, 곧 하느님의 빛에 의해 아직 비추어지지 않은 인간세계를 뜻하며, 또한 이런 어둠으로 인해 소경이 되거나 악의 세계로 타락한 인간 자신도 가리킨다. 따라서 “어둠”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빛”을 거부함으로써 생긴 결과다. “비치고 있다”의 현재형은 과거형으로 서술된 문맥에 걸맞지 않다. 그러나 저자는 말씀의 빛이 “빚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인간에게 계속 비치고 있다고 말하고자 현재형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빛을 이기지 못했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으나, 마치 “어둠”이 “빛”과 투쟁한 상황으로 오인 될 수 있기 때문에 문맥상으로나 내용상으로도 적당치 않다. 여기서는 “빛”이 인간에게 비치고 있으나 인간은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인간의 결정적 거부를 가리킨다. 이것이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다”는 현재형에 걸맞다. 즉, 인간이 “빛”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했는데도 그 빛은 인간에게 계속 비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6절 6-8절은 로고스 찬미가에 속하지 않고 저자가 삽입한 구절들이다. 요한복음 저자도 초대교회의 복음선포나 다른 복음서에서 볼 수 있듯이 “말씀”의 지상활동에 관한 보도를 세례자 요한 이야기를 현 문맥에 삽입한 이유는, 아마도 세례자 요한을 “빛”으로 여기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는 “빛”이 아니라 “빛”의 증언자였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말씀”안에 있는 “생명”이 곧 사람들의 “빛”이었다는 현 문맥이 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다. 따라서 “사람들의 빛”에 대한 그의 증언은 하느님으로부터 연유된 것으로 강조된다. 세례자 요한의 출현을 구약 예언자들의 파견 이야기와 흡사하게 서술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7절 세례자 요한의 임무는 오로지 “사람들의 빛”, 곧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에 있다. 그리고 그 증언은 “모두 믿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모두”란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와 관련된 표현이다. 8절 “사람들의 빛”과 세례자 요한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지만 호교론적 경향이 짙다. 세례자 요한은 “빛”이 아니라 “빛”에 대해 증언할 뿐이라는 점이 강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세례자 요한을 “빛”으로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있었음도 시사한다. 9절 “말씀”이 “참된 빛”이란 말은 “말씀이 하느님이셨다”와 관련된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 즉, “말씀”은 자신의 신성에서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모든 사람을 비출 수 있는 힘을 가지는 유일무이한 “참된 빛”이다. 10절 “세상”이란 말이 세 번이나 언급되는데, 그 개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세상”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을 총체적으로 가리킨다. 그러나 첫 번째와 세 번째 “세상”은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시공적 세계, 곧 인간세계를 가리킨다. 이 개념은 9절에서 언급된 세상과 같다. 즉 10절은 “말씀”과 인간세계와의 관계를 언급한다. “말씀”은 인간세계의 “생명”이요 “빛”으로서 인간이 알아볼 수 있도록 가까이 있었는데도 인간은 그 말씀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 개념의 뉘앙스 차이도 여기서 좀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즉, 시공적 인간세계로서의 세상, 창조된 모든 것을 가리키는 총체적 의미로서의 세상, “말씀”을 알아보지 못한 인간들을 가리키는 구체적 의미로서의 세상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세상”은 영지주의적 사고에 따른 이원론적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11절 10절을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한 구절로서 “말씀”이 세상에서 거부당한 극적 내용이 담겨 있다. 즉, “말씀”이 세상에서 거부당한 극적 내용이 담겨 있다. 즉 “말씀”은 자기로 말미암아 생겨난 세상, 곧 자기 영역으로 왔는데도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이 오히려 거부하고 나섰다. 달리 말하면 자기 영역에로 온 “말씀”은 모든 사람의 “빛”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그 빛을 맞이하도록 결단을 촉구했지만,“말씀”과 가장 밀접한 사람들이 오히려 그에 맞서 결정적으로 거부하고 말았다. 여기서도 “말씀”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세상이 인간 편의 거부로 인해 결국 하느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시사된다. 12절 11절과 대조를 이루는 구절로서 “말씀”을 맞아들이고 믿는 자들이 있었다는 점이 강조된다. 이들은 “말씀”으로 인해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힘을 선물로 얻게 되었다. 13절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자연적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에 의해 신비스럽게 이루어지는 초자연적 과정을 통해서라고 설명된다. 일부 사본에서는 “태어나다”란 동사가 단수 3인칭이고, 오히려 14절과 관련되어 있다. 즉 “말씀”이 영원 속에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난 신비를 말하고자 한다. 아마도 예수가 동정녀로부터 태어났다는 신비를 두고서 말하는 듯하다. 14절 14절은 로고스 찬미가의 절정이다. 1절의 “말씀”이란 표현이 그대로 다시 언급됨으로써 1절과 직접 관련을 맺고, 또한 “정녕”이란 표현과 함께 새로운 단락이 시작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인간 가운데 거처하심으로써 “그 말씀”에게는 새롭고 유일무이한 사건이 이루어졌다. 즉, 하느님과 함께한 “말씀”이 세상에 현존하면서 활동하시다가 이제 인간의 영역에 몸소 오셨다. 따라서 “정녕”이란 표현에는 “참으로, 실제로”란 뜻도 내포되어있다. “말씀은 육신이 되셨다”란 말은 “말씀은 육신으로 되셨다”와 비교하면 그 의미가 쉽게 파악된다. 아무튼 “말씀”은 “참으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서 거처하셨다”는 데에 번역은 모두 일치한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된 빛”. 곧 “말씀”은 육신이 되시어 모든 사람에게로 오셨다. 그래서 누구나 다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다. “우리”라는 말도 “우리 가운데서”와 같은 의미로 보면 인간 모두를 가리킨다. “우리 가운데서”가 “우리 인간 가운데서”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화한 말씀의 “영광을 보았다”는 말을 놓고보면 모든 인간이 아니라 육화한 말씀의 “영광”을 본 “증인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예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예수의 표징을 신앙적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목격증인들이 육화한 말씀을 찬양한 신앙고백이다. 저자가 “영광”을 설명하기 위해 첨부한 구절이다. 이제까지는 “하느님”으로만 언급되어 오다가 갑자기 “아버지”로 언급되는 점과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를 더욱 심도있게 표현하고자 요한복음만이 사용하는 독특한 용어인 “외(아들)”이란 표현이 이를 강하게 시사한다. 이 “영광”은 한마디로 아버지로부터 나온 “외(아들)”에게 속하고 “외(아들)”은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난 하느님과 유일무이한 관계를 지닌 아들이다. 따라서 천상적 영광이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아들의 것으로 언급됨으로 인해 지상에서 드러난 그 영광도 유일무이한 영광이라는 것을 뜻한다. 현 문맥에서는 “외(아들)”을 묘사한다. 그분은 인간을 결정적으로 돕고 구원할 능력, 곧 “은총과 진리로 충만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15절 예수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으로서 6-8절처럼 삽입된 구절이다. 이 내용은 30절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육화한 말씀이 세례자 요한보다 앞서게 되었다는 점이 강조되고, 그 이유는 말씀의 선재에 있다고 한다. 8절에서처럼 호교론적 색채가 짙다. 16절 14절에 직결되는 구절이며 로고스 찬미가는 원래 이 구절로 끝났으리라 본다. 육화한 말씀의 영광을 본 자들은 그분의 “충만함”에서 끊임없이 지속되는 바로 그 은총까지 실제로 받았다는 찬미와 감사의 노래다. 17절 18절과 함께 저자가 추가한 구절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게 된 “은총과 진리”는 14절에서 이미 언급된 내용이다. 여기서는 “은총과 진리”가 구체적으로 인간세계에 오게 된 경위가 강조될 뿐이다. “율법”은 요한복음에서 계시의 원천으로 언급되고, 모세는 율법을 주는 자요, 율법을 기록한 권위자다. 또한 모세는 예수에 관해 기록한 증언자다(5,45-47). 따라서 “율법”을 준 모세와 “은총과 진리”를 가져온 예수 그리스도는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아 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졌을 뿐이다. 그러나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왔다. 즉, 후자의 경우에는 종말론적 구원사건이 강조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행위가 종래의 구원질서를 능가했다는 저자의 설명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18절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거나 그분의 모습을 보았다고 내세우는 자들을 공박한 말로서 오로지 아버지로부터 온 “외(아들)”만이 하느님을 보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리하여 다음 구절의 언급을 가능케 해준다. 즉,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하느님께로 이르는 길은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느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으나, 문맥상 “하느님을 보는 것”과 관련된다. 따라서 하느님 안에 감추어진 천상적 영광, 곧 구원세계를 뜻할 수 있다. 이런 계시를 권위있게 할 수 있는 분은 “아버지의 품안에 계시는 분”이요 “외(아들)”이며 또한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즉, 하느님과 함께 선재한 분으로서 하느님과 본질적으로 같으며 하느님과 유일무이한 관계를 지닌 분으로서 육화한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저자는 여기서 지상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저자는 여기서 지상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품위와 계시 능력을 요약함으로써 다음에 보도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적 말씀을 위한 기틀을 마련한다. 이 구절은 로고스 찬미가와 예수의 공생활 보도를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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