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3일(화)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화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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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1-02 | 조회수252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제1독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3,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3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주해 29절 “그분이 의로우시다”의 “그분”은 하느님이시라고 보는 소수의견도 있으나,예수님이시라고 보는 게 통설이다. 통설에 따라 예수께서 의로우시다면 어떤 뜻으로의롭다는 것인가? 자비로우신다는 뜻이다. 앞 단락들에서 하느님이 의로우시다는 것도,예수께서 의로우시다는 자비로우시다는 뜻이었던 것처럼, 예수께서 의로우신 까닭에 하느님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변호해 주시듯이, 의로우신 예수, 곧 자비로우신 예수께서 종말에 그리스도인들을 구원해 주실 것이다. “의로운 일을 행하는 모든 이”역시 정의 실천가라는 뜻보다는 자비를 베푸는 사람을 뜻하리라. “하느님에게서 태어나다”는 요한 1서 다음 구절들에 있다. - 2.29: “의로운 일을 행하는 모든 이도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 3.9: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이는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그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4.7: “사랑하는 모든 이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모든 이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5.4: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이는 누구나 세상을 이깁니다.” 5.16: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이는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에서 태어나신 분이 그를 지켜 주시니 악한 자가 그를 건들지 못합니다.” 필자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을 “하느님의 자녀들”이라고 이름지었다. 이들은 의로운 일을 하고 사랑을 한다. 이와 반대로 악마의 사주를 받은 이들은 “악마의 자녀들”이다. 이들은 불의를 행하고 사랑을 저버린다. 하느님의 자녀들 3,1-10에서는 현재의 종말의 구원을 논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는 표현으로 현재의 구원을 “우리가 그분을 닮게 되리라....”는 표현으로 종말의 구원을 약술한다. 구원에 훼방을 놓은 것들로는 하느님, 그리스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적대적인 세상. 그리고 세상을 지배하는 악마가 나온다. 필자가 윤리적 동기로 구원론을 피력한 점에 유의하라.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자녀들답게 살아야지, 악마의 자녀들처럼 살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예수 강생과 죽음으로 이룩하신 과거의 구원 위업은 앞뒤 여러 단락에서 언급한다. 필자는 그리스도인들을 일컬어 “하느님의 자녀들”이라 하고, 예수님을 일컬어 “아들” 또는 “하느님의 아들”이라 한다. 예수께서는 친아들이요, 그리스도인들은 양자들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겠다. 단, 그리스도인들은 법적 양자 정도가 아니라, 실존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을 받아 진짜 자녀들이 된다고 필자는 보았다. 2절 그리스도인들의 종말 축복을 약술하여 “그분을 닮을 것이요,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뵈올 것”이라고 한다. 여기 두 차례 나오는 “그분”은 누구냐? 그리스도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경 종말론에서 “닮은”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또한 신약성경 종말론에서 “봄”은 주로 하느님을 뵙는다는 뜻 또는 예수를 뵙는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3절 “그분께 이런 희망을 걸고 있는 모든 이”의 “그분”은 그리스도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하느님이라는 설도 있다. “저분이 깨끗하신 것처럼 자신을 깨끗하게 합니다”의 “저분”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 옛날 깨끗한 레위들만이 천막 성전 하느님 어전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제 깨끗한 그리스도인들만이 하느님을 닮을 수 있고 뵐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본디 작죄하신 적이 없으시니 깨끗하시다, 그럼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서 깨끗해지나? 예수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셨고 언제고 하느님 앞에서 작죄한 우리를 변호해 주시기에 우리는 깨끗해질 수 있다. 4절 “죄는 곧 불법입니다”의 “불법”은 요한계 교회의 규범을 무시한 이단자들의 “방종”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으나 이단자들이 짓는 죄를 종말도래 직전에 나타나는 “흥악”으로 필자가 이해했다고 보는 설이 더 유익한다. 후자의 설을 뒷받침하는 전기로 2데살 2.3.7-8을 들 수 있다: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불법의 신비는 이미 작용하고 있습니다. 다만 붙들고 있는 이가 먼저 물러나야 됩니다. 그 때에는 그 무법자가 나타나지만 주 예수는 당신 입김으로 그를 없애실 것입니다.” 5절 5ㄱ절에는 대속사상이 나온다. 속죄제사 희생제물은 흠이 없어야 하는 것처럼 대속죄사건에 있어 제관이자 제물인 “예수 안에 죄가 없는 것”은 당연지사다. 6절 6ㄱ절의 뜻인즉 그리스도인은 작죄하기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실생활에서 그리스도인도 작죄하기 일쑤다.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면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라고 이해할 것이다. 진실로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살진데 작죄하지 않는다. 작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복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주해 하느님의 어린양 세례자 요한의 독백형식으로 엮어진 증언인데, 청중이 누구인지 분명치는 않다. 31절에 비추어볼 때,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어떤 무리로 추정될 뿐이다. 이 증언의 의미는 예수를 “하느님의 어린양”,“하느님의 아들”로 소개하고 알리는 데 있다. 29절 단락을 연결하기 위해 저자가 붙인 것에 불과하다. 이런 표현이 35.43절에도 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 내용이 예수의 메시아성을 증언하는 세례자의 입을 통해 선포된다. 즉,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을 온 인류의 죄를 지워 없애는 대속적 죽음으로 여기고서 예수를 신약의 “해방절 양”으로 상징하여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표현한 것이다. 물론 이 표상에는 고통받는 “야훼의 종”도 내포되어 있다. “세상이 죄를 없앤다”는 말은 예수의 일회적이고 보편적적인 속죄행위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해 죄로부터 해방되었고, 죄없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치하고 머물러 있음으로써 죄를 더 이상 범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30절 15절이 거의 그대로 반복된다. 15절은 저자의 머리말에 속한 증언이지만, 이 30절은 세례자의 입을 통해 직접 증언되는 점이 다를뿐이다. 세례자가 이미 “이분을 두고서 말한 적이 있다”는 것은 문맥상 27절을 가리킨다. 즉, 그리스도는 자기 뒤에 오시지만 자기는 그분 신발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치 못하다는 말로써 그리스도의 신비스런 품위를 표현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15절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의 선재에 두고 있다. 이 선재사상이 29절에서 시사된 예수의 속죄 죽음과 같은 맥락에서 언급된다. 즉, 초대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론적 신학사상이 세례자의 입을 통해 선포된다. 31절 세례자가 증언해야 할 분과 자기 자신과의 현격한 차이를 표현한다. 즉, 예수의 신비에 대해 전혀 몰랐는데,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그분을 증언하게 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33절 참조). 세례자의 임무는 한마디로 메시아를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에게 드러나게 알리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세례행위도 그런 임무에 속할 뿐이다. “드러나서 알려지도록 한다”는 말은 메시아가 이미 백성 가운데 드러나지 않은 채 머물다가 어느 날 공개적으로 드러나신다는 사실을 전제한 표현이다. 32절 공관복음에는 예수 세례 때의 신적 현현사건으로 보도된 것이 여기서는 세례자가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된 동기나 이유로 설명된다. 그리고 공관복음과는 달리 “영이 예수 위에 머물렀다”는 점이 강조된다. 이것은 예수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푼다”는 것과 관련되고 또한 메시아의 특성을 시사한다. 33절 예수 세례 때 일어난 현현의 의미가 세례자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31절과는 문맥상 의미가 다르다. 여기서는 예수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임을 몰랐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뜻한다. 세례자는 자신을 파견한 분의 계시를 통해서야 비로서 예수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임을 알게 되었다고 밝힌다. 이것은 그의 증언 내용과 증언 행위가 하느님의 계시에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한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란 말은 성령으로 가득 찬 분으로서 예수의 메사아적 행위와 관련된다. 특히 예수로 인해 가능해진 세례성사를 전재한다. 그렇다면 이 말도 속죄의 죽음을 통해 온 인류의 죄를 치워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나 하느님과 함께한 그리스도의 선재에 관한 언급과 함께 초대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론적 신앙고백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34절 세례자 자신의 눈으로 보았음을 강조한다. 일부 고대 사본에는 “하느님의 선택된 분”으로 되어 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과 거의 흡사한 뜻으로서 메시아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이란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같다는 뜻으로서 그리스도론적 칭호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세례자의 입을 통해 증언된 칭호라는 관점에서는 나타나엘이나 마르타의 입으로 고백된 “하느님의 아들”이란 칭호와 맥락을 같이한다고도 볼 수 있다. 즉 메시아적 의미로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아들”대신 “하느님의 선택된 분”이란 칭호를 선호하고 이 칭호가 더 원문에 가깝다고 보는 경향이 강하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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