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4 일(수) 주님 공현 대축일 전 수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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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1-03 | 조회수322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제1독서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9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주해 7절 7ㄱ절에서도 2.26에서처럼 이단자들의 속임수를 조심하라고 한다. 그들은 의로운 일을 행하지 않으면서 의롭다고 자부한 것 같다. 앞에서, 하느님이 의로우신고 예수 또한 의로우시다는 것은 정의롭다는 뜻을 넘어서 자비로우시다는 뜻이었다. 7ㄴ절에서는 예수께서 의로우시다고 하는데, 이 말의 뜻도 마찬가지이겠다. 그렇다면,“의로운 일”을 행한다는 것은 자비를 베푼다는 뜻이겠다. 아주 구체적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의로운 일을 행하는 그리스도인도 “의롭다”는 것 역시 “자비롭다”는 뜻으로 풀이하면 낱말 의미와 일관성이 유지된다. 8절 사람들은 악마, 일명 “악한 자”의 사주를 받아 죄를 짓는다. “악마 처음부터 죄를 지었다”의 “처음부터”는 “천지 창조 때부터”,또는 “교회 창립 때부터”라는 뜻이겠다. 요한복음에선 “악마”를,“세상의 두목”이라고 한다. 9절 “하느님의 씨”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보는 소수의견도 있지만,성령으로 보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지 않는다”.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인명에 관해서는 갖가지 견해가 분분하게 마련이다. 복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주해 첫 제자들 공관복음의 제자소명사화와는 구조나 내용이 전혀 다르다. 세례자의 두 제자는 자기네 스승의 말을 듣고서 예수의 첫 제자들이 되고, 시몬 베드로는 자기 형제 안드레아를 통해 제자로 부름받게 된다. 이로써 세례자의 증인활동이 성공적이었음이 시사된다. 제자들의 소명은 증인들의 입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첫 번 두 제자는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시몬 베드로는 안드레아를 통해서다. 필립보만 예외로 예수로부터 직접 부름받지만, 필립보의 증인을 통해 나타나엘의 소명도 이루어진다. 이 소명사화는 제자들을 위한 예수의 계시 말씀으로 끝맺는다. 36절 세례자가 지나가는 예수를 눈여겨본다는 것은 예수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리려는 눈치라는 것을 뜻한다. 그는 자기와 함께 서 있던 두 제자에게 예수를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선언한다. 그럼으로써 자기 제자들을 예수와 맺어 주려 한다. 37절 세례자 요한의 증인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그들이 예수를 “따라갔다”란 말은 예수에 대한 신뢰의 첫걸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첫걸음은 그들이 예수와 함께 머묾으로써 절정에 이른다. 38절 따라오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의 표명이며, 동시에 자기와 함께 머물고자 하는 진의를 묻는 말이다. 동문서답식 반문으로 보일 수 있지만, 예수의 신원에 관한 질문이므로 오히려 예수와 대화가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예수를 랍비(스승)라고 부르는 것도 직접 무엇인가를 듣고 배우고자 하는 원의를 시사한다. 39절 “와서 보시오”라는 예수의 초대말로써 이제 두 제자는 직접 예수 자신으로부터 받아들여진다. 특히 “보시오”란 말이 예수가 나타나엘이나 제자들에게 말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어떤 약속을 시사하기도 한다. “어디 머물고 계십니까?”란 반문에 담신 원의가 이제 실재로 이루어졌다. 예수와 함께 머물며 무엇인가를 듣고 배우려는 원의가 구체적으로 밝혀진 셈이다. 그들은 세례자로부터 들은 바를 더 분명히 알고자 했을 것이다. 원문에는 “제10시”로 되어 있다. 해뜰 때부터 해질 때 까지를 열두 시간으로 나누는 관습이었으니 “제10시”는 오후 네 시쯤이다. “10”이라는 숫자가 “완전”이나 “성취”의 때를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예수와 함께 머물며 나눈 대화의 시간과 그 성과와 의미를 시사하는 데 기여하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40절 익명의 다른 한 제자는 “예수가 사랑한 제자”. 곧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으로 추정되지만 입증할 수는 없다. 41절 안드레아는 시몬을 예수께 데려감으로써 자신이 고백한 바를 실천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준 셈이다. 안드레아는 자기가 만난 예수를 “메시아”, 곧 구약에서 예언 약속된 분으로 고백한다. 42절 안드레아는 시몬을 예수께 데려감으로써 자신이 고백한 바를 실천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준 셈이다. 예수가 시몬을 예사로 보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즉 개인적으로 무엇인가 알리고자 한다는 뜻이다. 시몬을 눈여겨본 예수는 먼저 그의 신원을 밝혀내고 앞으로 불릴 이름까지 알림으로써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즉, 신적 지식을 갖춘 계시자로서의 예수상이다. 이런 예수상이 안드레아가 고백한 “메시아”, 곧 유다인들의 모든 기대를 뛰어넘는 분으로서 계시된 셈이다. 그리고 예수의 이 말은 마태 16,17-19와 큰 차이가 있다. 우선 시몬의 아버지 이름이 다르다. 여기서는 “요한”으로, 마태 16.17에서는 “요나”로 명시된다. 시몬의 별명도 여기서는 아람어 게파(바위)로, 마태 16.18에서는 그리스어 베드로로 불린다. 또한 전자는 미래형으로서 예언적 특성이 있는 반면에, 후자는 현재형으로서 예수로부터 직접 정해지면서 사명까지 주어진다. 따라서 전자가 원전에 더 가까운 전승으로 여겨진다. 또한 마태 16,17-19와 병행되는 내용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요한복음에서는 시몬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도 전혀 다른 문맥에서 보도된다. 여기서는 시몬에게 게파라는 이름으로 알려주는 예수 그분께만 저자의 관심이 집중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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