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5일(목)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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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1-04 | 조회수251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습니다.> 13 그리고 형제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하여도 놀라지 마십시오. 16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21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면 주해 형제를 사랑하라 이 단락에서는 앞에서 요구한 “하느님의 계명” 곧 “의로운 일”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여 형제애를 다룬다. 그리스도인들은 형제로 통했으니만큼, 형제애는 요한계 교회 안에서 신도끼리 주고받는 사랑이다. 스스로 대속죄 죽음을 택하신 예수는 형제애의 지고지순한 귀감이시다. 형제에 실천 사례로 궁핍한 형제에게 재물을 나누어주는 것을 꼽는다. 11절 “처음부터 들어 온 시식”은 요한계 교회 시초에 애제자가 들려준 형제에 계명이다. “처음부터”라는 표현은 1.1; 2.7.13.14.24‘3.8.1; 2요한 5.6절에 나온다.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관련해서는 “영원무궁으로부터”라는 뜻이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과 관련해선 “교회 시초부터”라는 뜻이다. 12절 카인이 아우 아벨을 죽인 고사는 창세 4.1-16에 있다. 14절 요한 5.24 참조.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는 심판으로 들어가지 않고 오히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다”와 동의적 표현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다” 또는 어둠 속에 있지 않고 빛 속에 있다를 들 수 있다. 16절 16ㄱ절: “...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다”는 님을 위해 죽는다. 또는 남을 대신해서 죽는다는 뜻이다. 이 표현이 요한 10.11.15-18; 13.37-38; 15.13에 나온다. 공관복음에서는 “...을 대신해서 목숨을 주다”라고 한다. 이 표현들에는 대속신앙이 담겨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위타적 죽음을 본받아야 한다는 그리스도 모방 사상이 요한 15,12-13에도 나온다. 그밖에, 1요한 2.6;3.3;2.29;3.7;4.17에도 그리스도 모방 사상이 나온다. 기타 신약성경들은 마땅히 그분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 자신들을 낮추어야 한다. 고통을 견디어야 한다. 박해 때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고 한다. 17절 재산이 있는 교우들이 궁핍한 교우들을 도와야 한다는 훈계는 도어고금의 보편윤리다. 구약성경과 유다교에서도 자선을 강조했다. 신약성경 필자들 가운데서는 특히 루카가 자선을 강조했다. 18절 “말과 혀로”는 “혀에서 나오는 말로”라는 뜻이므로,“행실과 진리로써” 역시 “진리에서 비롯하는 행실로써”라는 뜻이겠다. 행동하는 믿음을 강조한 야고 2.14-26과 내용상으로 일맥상통한다. 하느님 자녀들의 확신 그리스도인이 형제애를 어겨서 죄를 지었다면 회개하여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서 마음의 평안을 얻을 것이요, 더군다나 죄를 짓지 않았다면 하느님을 신뢰할 것이라고 한다. 19-24절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인의 긴밀한 관계를 조명하는 아름다운 단락이다. 19절 “이것으로”는 사랑을 행함으로라는 뜻이다. 19ㄴ절의 경우 흔히 “하느님 앞에서 우리 마음을 진정시킬 것입닏”라고 번역하나,“하느님 앞에서 우리 마음을 확신시킬 것입니다”라고 번역하는 수도 있다. 20절 그리스도인이 죄를 지어서는 안되지만 죄를 짓고 사는 게 현실이다. 죄를 지으면 으레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마련이지만 하느님의 용서를 믿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다고 한다. 하느님이 용서해 주시는 까닭을 적시하여 편협한 우리와는 달리 도량이 넓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은 한편으로 작죄하지만 또 한편으로 형제애를 실천하기도 하는 우리의 처지를 고려하신다는 뜻이리라. 21절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지 않고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원리대로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뿐더러 현시점에서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것이다. 2.8; 4.17에서는 종말 구원을 확신한다는 말이 있다. 복음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45 이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주해 43절 이런 명령형은 제자 소명사화에 흔히 있다. 이 구절은 필립보 소명사화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45절 필립보는 체념하지 않고 오히려 “와서 보시오”란 말로 나타나엘을 예수에게로 이끈다. 이 말은 예수가 세례자의 두 제자를 초대할 때 사용한 말과 동일하다. 아무튼 나타나엘도 예수를 만나보면 자기처럼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확신에서 나온 표현이다. 46절 예수가 나자렛 출신이란 이유로 나타나엘은 필립보의 말에 회의한다. 즉, 나자렛 출신 예수가 메시아일 리 없다는 것이다. 사실상 나자렛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드러나지 않은 촌락이었다. 구약성서나 랍비들의 문헌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은 곳이다. 필립보는 체념하지 않고 오히려 “와서 보시오”란 말로 나타나엘을 예수에게로 이끈다. 이 말은 예수가 세례자의 두 제자를 초대할 때 사용된 말과 돌일하다. 아무튼 나타나엘도 예수를 만나보면 자기처럼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확신에서 나온 표현이다. 47절 나타나엘은 예수에게 감으로써 예수에 대한 관심 또는 필립보의 증언에 대한 신뢰를 드러낸 셈이다. 예수가 아직 알지도 못하던 나타나엘에게 이 칭찬을 한 것은 신적 지식을 갖춘 예수상을 시사한다. 이런 예수상은 성부와의 밀접한 관계를 뜻한다. 예수는 자신의 이 제자들에 대해서도 잘 안다. 사람들의 마음속까지 꿰뚫어볼 줄 안다. 이런 표현으로 저자는 예수의 메시아성을 시사한다. 예수가 나타나엘을 가리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명예로운 호칭이며,“거짓이 없구나”라는 말은 칭찬이다. 나타나엘은 “참된 이스라엘 사람”. 곧 하느님의 백성을 대표할 만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48절 놀라 당황한 나머지 묻는 말이다. 예수는 랍비들의 표현방식을 빌려 나타나엘의 내적 근황까지도 말한다. 즉,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라는 말은 율사들이 흔히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율법서를 공부한 데서 연유된 랍비들의 은유적 표현이다. 따라서 예수의 대답은 타나엘이 율법서를 공부하면서 특히 메시아 대망에 열중하고 있었다는 것을 드러낸 셈이다. 여기서도 신적 지식을 갖춘 예수상이 더욱 심도있게 시사된다. 49절 나타나엘은 사람의 마음까지 꿰뚫어보는 신적 지식을 갖춘 예수에게 압도되어 예수의 메시아성을 고백한다. 예수를 존경하는 뜻에서 먼저 “랍비”라고 부르고 “하느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한다. 이 두 칭호는 “예수는 성서에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라는 필립보의 말을 재확인하면서 예수의 메시아성을 드러낸다. “하느님의 아들”은 하느님과 친밀한 관 계를 뜻하는 메시아적 칭호로서 마르타가 예수에게 신앙고백하는 그런 차원은 아직 아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느님의 왕권을 이스라엘에서 재건할 “메시아”를 뜻한다. “하느님의 아들” 칭호와 함께 종교적 의미로 더욱 심화했고, 따라서 “유다인들의 왕”과는 다른 의미다. 50절 예수는 나타나엘의 고백을 인정하고, 그가 지금 체험한 놀라운 일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는 약속까지 한다. “더 큰 일”이란 예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계시적 말씀과 기적, 곧 “표징”을 뜻할 것이다. 일단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예수는 더 큰 약속을 한다. 예수를 통해 일으켜진 믿음은 예수의 계속적 계시를 통해 커질 수 있고 또 실제로 커지며 더욱 확고해진다는 것이다. 51절 예수의 자기계시가 나타나엘 개인에게 이루어진 것으로 시사한 저자의 표현이다. 그러나 내용상 제자들 모두에게 말한 예수의 자기계시다. “보게 될 것입니다”란 약속의 말인 50절과 이어져 있긴 하지만, 예수의 계시 말씀인 51절은 원래 독립적 토막말이었을 개연성이 크다. 예수의 계시 말씀 서두에 으레 언급되는, 요한복음의 변형적 표현방식이다. 계시 내용을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해 예수의 말씀을 계속 이끌거나 묻는 말에 대한 예수의 대답을 강조하는 구실을 한다. 이 계시 말씀은 18절과 34절에서처럼 문맥상 절정에 이른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서 첫 번째로 언급되는 예수의 자기계시이자 증언이다. 예수에 대한 증인의 절정이 18절에서는 저자의 서술식으로, 34절에서는 세례자의 입으로 언급되었다. 그리고 나타나엘에게 약속한 “더 큰 일”이 현 문맥상 “하늘이 열려 있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를 올라가고 내려오는 것”으로 언급된다. “사람의 아들”은 여기서 “야곱의 천상 사다리”표상에 따라 하느님의 계시 장소, 곧 하느님의 지상 현존 장소로만 소개된다. 즉, “사람의 아들”을 통해 하느님이 지상에 현존하신다는 점만 강조된다. “사람의 아들”이 하늘에서 왔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그런 분으로는 아직 소개되지 않는다. 예수의 이 계시 말씀은 사람의 아들”에 관한 첫 번째 계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어느 여성이 그럽디다. "나는 꿰뚫어보는 사람은 정말 싫어." 무엇을 감추길래 그러는지. 오히려 그사람이 신적 지식을 갖춘것을 찬미하며 보아야 할터인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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