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4 일(토) 연중 제1주간 토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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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1-13 | 조회수298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14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주해 12절 훈화는 이제 저자가 인용한 성서말씀의 권위를 높이는 말씀에 관한 신학으로 끝난다.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일종의 짤막한 찬미가라 할 수 있는 12-13절은 그 표현이나 사상에 있어 구약성서와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헤 18,15-16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용감무쌍한 전사에 비기면서 이렇게 말한다. “주님의 전능하신 말슴이 마치 사정없는 천사처럼 멸망한 땅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그는 날카로운 칼과 같은 주님의 확고부동한 명령을 가지고 와서 우뚝 서서 온 세상을 시체로 가득 채웠다.” 유다인 철학자 필로 역시 창세 18.10에 대한 해설에서 비록 범신론적인 관점에서나마 “하느님의 말씀은 자연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나누고 쪼갠다”라고 한다. 히브리서의 저자도 하느님의 말씀의 특징을 심판자이신 하느님에 비겨 설명하고 있으나 완전히 독특한 면을 보이고 있다. “살아 있고 힘이 있다”라는 말은 표현 그대로 생명을 지니고 능력을 발휘하는 실체라는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단순히 울리는 소리나 아무런 힘이 없는 언어가 아니다. 이 말씀은 생명 자체이신 하느님의 또 다른 실체로서 뜻하는 바를 그대로 이룬다. 사람이 이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면 생명을 얻고 거절하면 생명을 잃는다. 요한 6장의 “생명의 빵”,“살아 있는 빵”,“살게 하는 영”등의 표현도 생명과 능력을 지닌 이 말씀의 의미를 어느 정도 밝혀준다. 묵시문학적 표현으로, 말씀이 양날칼과같이 날카로워 그 무엇에도 막히지 않고 깊이 뚫고들어간다는 말이다. “혼”과 “영”은 거의 같은 표현으로, 혼은 정신적인 의미가 강하고, 영은 종교적인 의미가 강하다. 둘다 육체와 대비되는 사람의 가장 내면적인 요소들이다, 관절과 골수는 단순히 육체의 한 부분이 아니라 육체의 가장 좁고 빽빽한 부분이다. 결국 이들 표현은 정신과 육체의 구체적인 부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육체의 가장 내면적인 분야까지라도 파고들어갈 수 있는 하느님 말씀의 능력과 활동력을 표현한다. “마음의 생각과 의향”도 같은 차원에서 알아들어야 한다. 13절 13절은 당신 말씀을 통하여 어디서나 파고들어가며 모든 것을 훤히 다 보시는 하느님 앞에 사람은 그 어떤 것도 숨길 수 없는 벌거벗은 존재라는 점을 설명한다. 직역하면 “그(분)을 향해 우리에게 말이 (있다)”로서 사실 직역하기조차 어려운 히브리어적 표현으로서 누구에게 보고하거나 셈을 바쳐야 할 때 쓰이는 말이다. 따라서 심판하실 하느님께 셈을 바치고 그분의 말씀에 대답해야 할 우리의 입장을 뜻한다. “드러나 있다”는 신약성서에서 여기만 나오는 단어로, 어원상으로는 상대방의 목을 죄어 땅에 내동댕이치는 행위, 또는 짐승의 가죽을 벗겨 내장을 드러내는 행위 등을 뜻한다. 그러나 여시서는 그 문맥상 하느님의 눈앞에는 만사가 훤히 드러나는 상태임을 표현한다. 14절 예수께서는 참된 지성소인 하늘에 들어가신 위대한 대제관이며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이스라엘의 왕들이나 로마 황제들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긴했지만, 그분은 부활하신 뒤에 명백히 드러난 바와 같이 참된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고백하는 그리스도를 굳게 신뢰하여야 한다. 15절 예수께서 위대한 대이관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면만 보면 사람이 가까이 가기 어려운 지존한 분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이 구절은 이러한 오해를 풀기 위해 그분은 그토록 지존한 분이면서도 그 누구보다 우리 사람과 가까운 분임을 그분의 지상 생활을 통해 증명한다. 여기서 “동정하다”는 단순히 심리적으로 “측은히 여기다”라는 말이 아니라, 희로애락을 같이하고 유혹.시련.고통 등 사람의 나약함을 함께 겪는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필로가 알려주는 구약의 대제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수께서 아무 죄도 짓지 않으셨다는 것은 신약성서의 기본 사상이다. 예수께서 유혹을 받으셨다는 말은 광야의 유혹인 게쎄마니의 유혹 등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더 나아가 그분의 지상생활을 하시는 동안에 우리와 같은 연약한 사람으로서 겪으셨던 모든 어려움, 고통, 유혹 등을 통틀어서 말한다. 그분은 죄를 제외하고는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다 체험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정을 잘 이해하고 동정하며 같이 아파하신다. 16절 구약에서는 대제관만이 하느님의 현존 장소인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을 동정하시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유혹에 계시므로 평범한 우리도 모두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 하느님의 옥좌는 더 이상 두려운 지존의 옥좌가 아니라 은총과 자비의 자리다.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주해 13절 레위를 부르고 세관원들과 식사하시다 이 단원은 레위를 부르신 소명사화 및 세관원들과 식사하신 이야기로 엮여 있다. 본디 두 가지 이야기는 따로따로 전해왔다. 마르코는 그것들을 연결하면서 더러 가필했다. 14절 레위 소명사화의 양식은 네 어부를 제자로 삼으신 소명사화의 경우처럼 상황묘사, 소명, 추종으로 짜여 있다. 레위는 열두 제자단에 속하지 않은 제자로서 그는 세관원이었다. 당시 관세는 지방세로서 갈릴래아에서는 그 지방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가 거두어들였다. 그러나 관리를 두어 직접 징수하지 않고 세관별로 임차료만 받고 일정한 기간 동안 관세 징수권을 민간인에게 빌려 주었다. 임차대 계약에 따라 실제로 관세를 징수하는 민간인이 곧 “세관원”이다. 세관원은 흔히 이방인들과 접촉할 뿐 아니라 터무니없이 관세를 많이 매겨 부당하게 치부했기 때문에 직책상으로 죄인 취급을 받았다. 유다교를 올바로 믿으려면 세관원직을 떠나야만 했다. 15절 15-17절의 양식을 보면 간결한 상황묘사로 시작하여 예수님의 말씀으로 끝맺는다. 이런 양식을 일컬어 그리스 문학계에서는 아포프테그마라 하는데 우리말로는 “상황어”라 하겠다. 상황어 양식이 15-17,18-22.23-28절에 들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세 가지 단원은 이미 전승단계에서 집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마르코는 그것을 별로 고치지 않고 전해진 그대로 수록한 것 같다. 그러나 집성되기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면 15-17절의 상황어는 앞위 문맥과 상관없이 따로 전해왔다. 여기 상황어만 따로 살펴볼 때 “그의 집”이 누구의 집인지 알 수 없다. 예수님의 집일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의 집인즉 예수께서 자주 기거하신 시몬 베드로의 집을 뜻할 것이다. 원문에서는 “식사하다” 대신 “눕다”라 한다. 당시 사람들은 회식할 때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했다. “죄인들”은 세관원처럼 직책상 불결한 사람들이거나 율법, 특히 정결법을 엄수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16절 바리사이파는 기원전 167년에 시작된 이스라엘 독립전쟁에 가담한 경건자들 가운데서 묵시문하적 사상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오나탄 치세 때(기원전 160~143년) 결성한 종파다. 예수 당시 사두가이파, 에쎄느파, 열혈당파와 더불어 큰 종파로 등장했는데 회원은 주로 평신도로서 6,000명 가량 되었다. 그들은 구약성경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전통도 중히 여겨 거기에 내포된 율법규정을, 특히 정결법을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했다. 아울러 자기네처럼 살지 않는 동포들을 천민이라 하여 멸시했다. 예수께서는 종종 율법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을 취하시고 또한 천민들과 어울려 지내셨기 때문에 바리사이들의 비위를 거느렸다. 그 결과 예수께서는 그들과 적대관계에 있었으나 더러 그들의 초대를 받기도 하셨다. “바리사이파 율사들”은 바리사이들 가운데서 율법을 전공한 사람들이다. 사실 예수 당시 율사는 주로 바라시이파에 속했다. 예수께서 이런 부류 사람들과 자주 어울려 식사하신 때문에 “먹보요 술군이며 세관원들과 죄인들의 친구로구나”라는 비난을 받으셨다. 17절 이 상징어와 비슷한 말이 이스라엘과 그리스뿐 아니라 중국에도 유행했다. 장자는 공자의 말이라면서 이렇게 적었다. “다스려진 나라는 버리고 어지러운 나라로 가라. 의원의 집에는 병자가 많다”. 그러니 의사에 관한 상징어는 속담이라 하겠는데 예수 친히 이 속담을 발설하셨을 가능성도 없지 않으나 그보다는 마르코 이전의 전승자가 그것을 여기에 삽입했을 가능성이 더 많다. 바리사이들은 의인으로 자처하고 세관원 따위 천민을 죄인이라 경멸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을 아끼시는 하느님을 강하게 의식하신 나머지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 전부를 모으려는 의도를 분명히 하시어 이스라엘 열 두 부족을 상징하는 열두 제자를 선발하셨다. 아울러 특히 소외자들을 돌보시는 하느님을 깊이 체험하신 나머지 그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셨다. 그러므로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 모두를 부르러 오셨지만 특히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나는 ...하러 왔습니다“에는 예수님의 사명감이 드러나는데, 같은 형테의 말씀이 10.45에도 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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