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5일(일) 연중 제2주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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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1-14 | 조회수315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제1독서 -.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제2독서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주해 인사와 감사 1,1-9는 그리스도로적으로 매우 밀도깊게 짜여 있다. “그리스도”라는 단어가 아홉 번, “예수”가 여덟 번. “주가 다섯 번 나온다” 1-3절에만 “하느님”이 세 번. “예수 그리스도”가 네 번 언급된다. 그리스도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본에서 야훼께 적용하는 퀴리오스라는 칭호를 2.8절에서 예수께 적용한다는 점이다. 1절 1.1-3은 바오로의 편지 양식에서 “서두인사” 부분에 해당한다. 바오로는 일반적으로 당대의 그리스어 편지 양식을 따른다. 그 시대의 그리스어 편지 서두인사는 일반적으로 발신자의 이름, 수신자의 이름, 카이레인의 세 요소로 구성된다. 바오로는 이 세 요소 사이사이에 긴 수식어를 붙이는데, 이 수식어들은 짚은 신학적 의미가 있다. “사도”라는 칭호에 “하느님의 뜻으로”라는 수식어와 “부르심을 받은”이라는 수식어가 첨가됨으로써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고린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바오로의 권위가 강조된다. 여기서 “형제”란 “그리스도 신앙인”을 뜻한다. 유다인은 가족이나 친척이 아니라도 가끔 서로 “형제”라고 불렀다. 바오로에 의하면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깊은 의미에서 참으로 서로 “형제자매”다. 사도 18,17의 소스타네라는 회당장이 1절의 공동발신자와 동일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아무튼 소스테네는 바오로와 함께 고린토 전서의 공동발신자로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고린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명망있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2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되었다”라는 표현은 거룩함의 은사적 성격을 드러낸다. 즉, 거룩함은 선사받는 것이지 성취해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들과 우리들의”라는 말이 원문에서는 2절 끝에 있는데 뜻이 모호하다.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하나는 위에 채택된 번역처럼 이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과 우리들의 (주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후자로 보기에는 수식되는 말과 수식하는 말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이 표현은 “야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마다 구원을 받으리라”는 요엘 3.5를 배경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로마 10.13과 사도 2.21에서는 이 말씀을 취하면서 “야훼인 주님”을 “예수인 주님”으로 재해석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인”이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전문표현이 되기도 한다. 원문에서 2절의 쉰(“와 함께”)이후 문장을 어디에 연결시키느냐에 따라 몇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위에 채택된 번역도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이 번역은 쉰 전치사의 의미와 바오로의 편지 양식을 고려하여 수신자들과 다른 모든 신앙인과의 연대성을 잘 드러낸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 지칭한 바오로는 이제 고린토 그리스도인들을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라고 부른다. 부리신 주체는 하느님이다. 바오로는 여기서 거룩함에로 부르심받음과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함을 어느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라고 본다. 2절은 바오로의 교회론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많다. 교회의 보편성과 구체성, 교회의 거룩함, 하느님이 불러모으신 “하느님의 교회”, 보편적인 “하느님의 교회”가 “고린토 공동체”라는 지역교회에서 구체화한다. 바오로가 말하는 교회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집회”로서 “하느님의”교회다. 에클레시아라는 말만으로는 바오로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교회관을 표현하기에 부족했을 것이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일반 사람들에게 에클레시아란 “시(市)의 제반 사항을 토의하기 위한 시민들의 집회”라는 세속정치적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에크레시아의 종교적 사용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처음 생겨난 것은 아니다, 이미 칠십인역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집회”를 뜻하던 히브리어 카할을 에클레시아로 번역했다. 카할이란 동사로는 “소집하다”, 명사로는 “집회”를 뜻한다. 이 칠십인역 용례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에클레시아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로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받은 신앙인들의 모임”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3절 당대의 일반 편지 양식과 비교하여 바오로의 편지가 다른 점은 무엇보다도 카이레인(인사합니다)이라는 간단한 인사를 “은총”과 “평화”의 축원으로 대체한다는 점이다. 은총과 평화는 바오로에게 있어 하느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선사하시는 구원을 표현하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개념이다. 특히 “은총”은 예쑤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행위 전체를 총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바오로 편지들의 시작과 끝은 모두 “은총과 축원”을 포함한다. “평화”는 여기서 “내적 평온”만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하느님과의 관계의 “온전함”(히브리어 살롬은 “온전하다”는 뜻을 내포한다)을 표현한다. 복음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주해 하느님의 어린양 세례자 요한의 독백형식으로 엮어진 증언인데, 청중이 누구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31절에 비추어볼 때,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어떤 무리로 추정될 뿐이다. 이 증언의 의미는 예수를 “하느님의 어린양”, “하느님의 아들”로 소개하고 알리는 데 있다. 29절 단락을 연결하기 위해 저자가 붙인 것에 불과하다. 이런 표현이 35.43절에도 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 내용이 예수의 메시아성을 증언하는 세례자의 입을 통해 선포된다. 즉,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을 온 인류의 죄를 치워 없애는 대속적 죽음으로 여기고서 예수를 신약의 “해방절 양”으로 상정하여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표현한 것이다. 물론 이 표징에는 고통받는 “야훼의 종”도 내포되어 있다. “세상의 죄를 없앤다”는 말은 예수의 일회적이고 보편적인 속죄행위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해 죄로부터 해방되었고, 죄없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치하고 머물러 있음으로써 죄를 더 이상 범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30절 15절이 거의 그대로 반복된다. 15절은 저자의 머리말에 속한 증언이지만, 이 30절은 세례자의 입을 통해 직접 증언되는 점이 다를 뿐이다. 세례자가 이미 “이분을 두고서 말한 적이 있다”는 것은 문맥상 27절을 가리킨다. 즉, 그리스도는 자기 뒤에 오시지만 자기는 그분 신발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치 못하다는 말로써 그리스도의 신비스런 품위를 표현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15절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의 선재에 두고 있다. 이 선재사상이 29절에서 시사된 예수의 속죄 죽음과 같은 맥락에서 언급된다. 즉, 초대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론적 신학사상이 세례자의 입을 통해 선포된다. 31절 세례자의 증언해야 할 분과 자기 자신과의 현격한 차이를 표현한다. 즉, 예수의 신비에 대해 전혀 몰랐는데,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그분을 증언하게 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요한복음에서 “이스라엘”은 “유다인들”과 달리 항상 긍정적 의미를 지닌다. 계시와 약속을 받은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을 가리키는 명예스런 칭호다. 그리고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유다인들”은 항상 예수의 적수로 언급된다. 세례자의 임무는 한마디로 메시아를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에게 드러나게 알리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세례행위도 그런 임무에 속할 뿐이다. “드러나서 알려지도록 한다”는 메시아가 이미 백성 가운데 드러나지 않은 채 머물다가 어느 날 공개적으로 드러나신다는 사실을 전제한 표현이다. 32절 공관복음에는 예수 세례 때의 신적 현현사건으로 보도된 것이 여기서는 세례자가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된 동기나 이유로 설명된다. 그리고 공관복음과는 달리 “영이 예수 위에 머물렀다”는 점이 강조된다. 이것은 예수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푼다”는 것과 관련되고 또한 메시아의 특성을 시사한다. 33절 예수 세례 때 일어난 신적 현현의 의미가 세례자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31절과는 문맥상 의미가 다르다. 여기서는 예수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임을 몰랐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뜻한다. 세례자는 자신을 파견한 분의 계시를 통해서야 비로소 예수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임을 알게 되었다고 밝힌다. 이것은 그의 증언 내용과 증언 행위가 하느님의 계시에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한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란 말은 성령으로 가득 찬 분으로서 예수의 메시아적 행위와 관련된다. 특히 예수로 인해 가능해진 세례성사를 전제한다. 그렇다면 이 말도 속죄의 죽음을 통해 온 인류의 죄를 치워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나 하느님과 함께한 그리스도의 선재에 관한 언급과 함께 초대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론적 신앙고백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34절 세례자 자신의 눈으로 보았음을 강조한다. 일부 고대 사본에는 “하느님의 선택된 분”으로 되어 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과 거의 흡사한 뜻으로서 메시아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이란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같다는 뜻으로서 그리스도론적 칭호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세례자의 입을 통해 증언된 칭호라는 관점에서는 나타나엘이나 마르타의 입으로 고백된 “하느님의 아들”이란 칭호와 맥락을 같이한다고도 볼 수 있다. 즉, 메시아적 의미로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아들”대신 “하느님의 선택된 분”이란 칭호를 선호하고, 이 칭호가 더 원문에 가깝다고 보는 경향이 강하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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