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6 연중 제2주간 월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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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1-15 | 조회수232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5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대사제가 되는 영광을 스스로 차지하신 것이 아니라, 7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주해 인간을 동정하는 대제관이신 예수 3,1-6에서는 예수께서 하느님께 성실한 대제관이심을 밝혔지만, 5,1-10에서는 그분이 사람을 동정하는 자비로운 대제관이심을 밝힌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먼저 구약 대제관의 자격 요건을 제시하고, 그러한 자격 요건이 예수께 완전히 갖추어져 있음을 증명한다. 1절 1-3절은 대제관의 인간적 요소와 그에 따르는 직무를 제시한다. 대제관은 그가 돌보는 백성들과 똑같은 연약한 사람으로서 백성뿐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의 제사를 바쳐야 한다. 1절은 대제관에 대한 간단한 정의다. 대제관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 가운데서 선택된 사람이다. 그가 사람이라는 사실이 왜 중요한가는 2절에서 설명한다. 그 다음 대제관은 하느님에 관한 일을 맡고 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서 예배를 드리고 그분이 제시하시는 법과 바른 길을 사람들에게 알린다. 나아가 대제관은 사람들을 위해 제사를 바친다. 이 세 요소 가운데 앞의 두 가지는 모세를, 마지막 것은 아론을 반영한다. 2절 구약성서는 악의 없이 모르고 지은 죄와 알고서 고의로 지은 죄를 구별한다. 전자는 의인들도 범할 수 있는 죄로 쉽게 용서를 받는다. 그러나 여기서는 죄나 죄인의 종류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고 알게 모르게 잘못을 저지르는 모든 사람을 말한다. “대할 수”의 본 의미는 “감정을 누르고 조절하다”라는 뜻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동정하다”와 비슷한 뜻의 단어다. 대제관은 자기도 연약한 사람으로서 곧잘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잘못에 지나치게 엄격하지 않고 가능하면 이해한다. 3절 속죄의 날이 되면 대제관은 백성을 위하여 제사를 바치기 전에 자신과 그의 가족을 위하여 황소나 송아지를 제물로 하는 속죄의 제사를 바친다. 그는 죄인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니라, 죄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의 제사를 바칠 의무가 있다. 4절 제관이 되기 위한 또 다른 주요한 자격요건은 하느님의 부르심이다. 누구든지 제관이 되려면 아론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 이 자리에 처음 등장하는 아론은 유다 전승에서 레위 제관들의 원조이자 대변인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5절 5-10절에서는 1-4절에서 말한 제관직의 자격과 역할을 예수께 비교하여 그분의 제관 자격과 역할을 밝힌다. 머저 5-6절에서는 예수께서 아론과 같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합법적인 제관이요 영원한 제관이심을 시편 2.7과 110.4를 들어 증명한다. 시편 2.7은 1.5에서 이미 인용한 바와 같이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선언하는 구절이다. 제관직을 증명하는 자리에서 이런 성서구절을 다시 인용하는 이유는 그분이 아론계의 제관과는 다른 유일한 대제관이심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6절 1.3과 1.13에서 이미 인용한 시편 110장의 3절,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제관이심을 선언한다. “본”은 순서. 질서. 지위. 규정 등으로도 번역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인물이나 사물의 질과 특성을 나타내는 “본보기”라는 의미로 쓰였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이 시편을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제관인 멜기세덱의 본보기를 따라 영원한 제관이심을 선언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이에 관해서는 7장에서 다시 상세히 설명할 것이다. 7절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이 구절은 언뜻 보면 게쎄마니 장면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어휘는 오히려 탄원 시편에 가깝다. 이러한 배경들을 참고하면서 볼 때,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활을 하시는 동안 사람으로서 온갖 고통과 번민을 겪으셨지만 그러한 어려움 중에도 하느님께 순종하셨기 때문에 하느님은 그분의 간구와 기도를 들어주셨음을 증언한다. 직여하면 “육의 날”, 그리스도는 연약한 사람으로서 지상 생활을 하셨다. “경외심”은 존경심에서 우러나는 두려움이다. 8절 고난을 통해 복종을 배운다는 가르침은 칠십인역의 지혜문학 성서에 가끔 발견되는 사상이다. 필로의 저서에서는 “고난을 겪가”의 “배우다”가 자주 함께 쓰일 뿐 아니라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그분의 절대적 순종의 결과이자 천상 영광의 바탕으로 믿고 고백했다. 9절 “완전하게 되다”는 “축성되다”의 뜻도 포함한다. 여기서는 두 의미를 다 내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부께 순종하여 자신을 바침으로써 주님이자 영원한 대제관이 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순종과 헌신을 완전하게 되고 인간 구원의 원천이 되셨다. 사람들은 이 그리스도로부터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구원에 이른 방법도 배운다. 10절 그리스도께서는 수난과 복종의 결과 완전하게 되시고 구원의 원천이 되셨으며, 동시에 대제관으로 임명되셨다. 이 셋은 서로 다르면서도 밀접히 연결되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이 항목의 주제는 대제관이다. “임명되다”는 왕의 대관식이나 대제관 축성식과 같이 장엄하게 임명되고 선포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복음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20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주해 단식논쟁-새 것과 헌 것 이 단원은 예수 생전에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았다는 상황어. 예수 사후에 그들이 단식하게 되었다는 말, 새것과 헌것은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중단절어로 짜여 있다. 18절 18ㄱ절은 마르코가 덧붙인 것이다. 본디 이 단원은 “그래서 사람들이 와서 그분께 ...”로 시작했다. 유다교인들은 일년에 한 번 속죄의 날에 의무적으로 단식했다. 그러나 요한 세례자의 제자들은 스승의 고행을 본받아 자주 단식했던 모양이다. 바리사이들은 매주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보요 술꾼으로” 통한 스승의 영향으로 예수 생전에는 속죄의 날을 제외하고 단식하지 않았다. 율사의 제자는 있을지언정 “바리사이의 제자”란 없다. 단순히 바리사이 무리라고 보면 무방할 것이다. 19절 구약에서는 혼인잔치 상징으로써 종말론적 구원을 서술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시대야말로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시기라 하신다. 상징어의 뜻인즉 구약의 약속이 실현되어 종말론적 구원이 이룩되는 시기라는 것이다. 질문에 대한 답변은 본디 19ㄱ절로써 충분하다. 그렇다면 19ㄴ-20은 초대교회에서 만들어 덧붙였다하겠는데 왜 그렇게 했을까? 예수시대에는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았는데 스승이 돌아가신 다음 교회시대에는 신도들이 단식하게 되 연유를 밝히고자 19ㄴ-20절을 만들어 덧붙였을 것이다. 여기서 제시하는 단식 동기인즉 신랑이 떠나 혼인잔치가 끝났기 때문에, 곧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흥이 깨졌기 때문에 단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1세기 교회에는 단식하는 풍습이 있었다. 언제 단식했던가? 짐작에 불과하나 처음에는 예수께서 운명하신 금요일에 단식했을 것이다. 1세기 말엽에는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하는 풍습이 있었다. 21절 21-22절은 본디 앞뒤 문맥과 상관없이 전해온 이중단절어다. 그 표현이 상징적이므로 이중상징어라 해도 좋다. 이 상징어는 일상생활에서 얻은 체험을 드러내기 때문에 생활의 지혜 혹은 인생 예지라 할 수 있다. 새 것은 강하고 헌 것은 약해서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상징어는 무엇을 뜻할까?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혁신적이고 위력적이므로 그에 맞갖은 “회개”역시 새롭고 힘차야 한다는 것이리라.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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