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9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독서, 복음(주해) | |||
---|---|---|---|---|
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1-28 | 조회수213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한국 교회는 해마다 1월 마지막 주일을 ‘해외 원조 주일’로 지내고 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2003년 추계 정기 총회에서 해외 원조 사업에 대한 올바로 홍보하고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도모하고자 ‘해외 원조 주일’을 정하였다. 오늘 특별 헌금은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등지의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들을 돕는 데에 쓰인다. 제1독서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라.> 3,12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 -.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라.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29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주해 부르심받던 때의 처지 18-25절에 제시된 하느님 지혜의 방식이 이 단락에서는 고린토 그리스도인들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적용되고,2,1-5에서는 바오로의 복음선포 활동에 적용된다. 26절 직역은 “육(肉)에 의하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이라는 뜻이다(로마 1.3 참조). 30절 여기서 “있다” 동사의 강한 의미를 감안하여 풀어 보면 다음과 같다. 하느님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있으나마나한” 여러분을 선택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도록”하셨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 눈에 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눈에 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것이 여러분의 자랑거리다. 30절에 나오는 “의”. “성화”, “속량”이라는 세 단어는 바오로의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 사건의 구원적인 결과를 표현하는 중요한 개념들로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6.11에서는 그리스도 신앙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과거의 삶과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제) 씻겨졌습니다! 그러나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의롭게 되었습니다!” 이 6.11에서 바오로는 “의”와 “성화”를 말하면서 분명히 “세례”도 염두에 두고 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의와 성화와 속량을 말하면서 세례를 염두에 두고 있다. 디카이오쉬네란 성서 밖의 일반 그리스어에서는 본디 한 덕으로서 “의로움, 올바름, 정의”라는 뜻인데, 신약성서에서는 이러한 의미를 후 훨씬 넘어선다. 신약성서에서 이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바오로는 칠십인역 구약성서의 영향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제공되고 믿음과 그 믿음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결합의 표현인 세례를 통해 참여하는 “구원 선물”로서의 “의”라는 뜻으로 주로 사용한다. 칠십인역에서 디카이오쉬네는 대부분 히브리어 체데카 또는 체덱의 번역이지만 때로는 “은총” 또는 “자비”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헤세드의 번역일 때도 있을 만큼, 심판적 의미보다는 “계약”을 배경으로 하는 개념으로서 두 상대방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하는 올바름을 뜻한다. 그래서 이 단어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에서 하느님께 적용될 때는, 하느님이 “계약의 하느님으로서” 마땅히 하시는 일들을 의미한다. 이 때 “하느님의 체데카”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구원적일 수도 있고 심판적일 수도 있지만 주로 구원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체데카라는 말이 적용될 때는 이스라엘이 “계약의 백성으로서” 계약의 합당한 삶의 상태를 의미한다. 하느님 앞에서의 의로움은 구약성서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적 상태다. 바오로는 바로 이 “의”의 은사적 성격을 매우 강조한다. 구약성서에서 인간이 추구하되 도달하기 어려운 그 “의”를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모든 인류에게 베푸신다고 강조한다. “의”의 은사적 성격은 이미 고린토 전서에서 분명히 볼 수 있지만, 후일 율법 논쟁의 배경하에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더욱 깊이 다루어진다.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하느님의 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복음의 요체를 제시하려고 노력한다. 구약성서를 배경으로 볼 때 “의”는 하느님의 법정을 연상시키는 법적 용어인데 비해, “성화”는 성전 제사를 연상시키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선물이다. 바오로는 그리스도 신앙인을 비신앙인과 구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된 이들” 또는 간단히 “거룩한 이들” 이라고 칭한다. 거룩하신 하느님과 친교를 거룩해져야 하는데, 바오로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이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거록하게 되었다. “속량”이라고 번역된 아풀뤼트로시스는 속전을 받고 노예나 포로를 풀어주는 사회제도를 배경으로 하는데, 해방과 자유라는 관점에서 구원을 표현한다. 신약성서의 이 용어 배경에는 하느님을 고엘로 이해하는 구약성서 전통이 있다. 복음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주해 3절 “영”과 “가난한 이들”은 매우 흔한 낱말이다. 그러나 구약, 신약을 통틀어 두 낱말이 함께 붙어 사용된 경우는 없다.오직 마태 5.3에만 “영으로 가난한 이들”이란 표현이 나온다. 그러니 그 뜻이 자뭇 불분명할 밖에. 그러던 차에 1947년부터 발견된 쿰란 문헌에 보면 “영의 가난한 이들”이란 표현이 두 번 나오는데, 예수 시대 쿰란 수도자들이 그렇게 자처했다. “영의 가난한 이들”의 반대가 완고한 마음인 점으로 미루어 “영의 가난한 이들”은 겸손한 이들이라 하겠다. 쿰란 수도자들은 빈자의 영성에 심취했던 까닭에 “영의 가난한 이들”말고도 “은총의 가난한 이들”,“당신 구원의 가난한 이들” 또는 “가난한 이들”로 자처하기도 했다. 다른 해설 두 가지: 영으로 가난한 이란 실제로는 사유 재산을 소유하더라도 물욕을 버린 사람을 가리킨다는 설이 있다. 가톨릭 수도원에서 즐겨 내세우는 또 한 가지 설로서, 사유재산을 포기하기로 청빈서원을 발한 수도자야말로 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영의 부추김을 받아 자발적으로 가난을 체험하고 감수한다기보다 가난을 자신의 숙명으로 여기는 후련한 경지를 말합니다. ...” 이는 예수회의 영성수련 또는 불가의 선 수행에서 우러나온 깨달음일지언정. 아무래도 마태 5.3의 참뜻과는 거리가 먼 발상이다. 끝으로 우리말 번역 문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잘못된 번역이다. 그리스어 원문에는 “마음이”가 없고 그 대신 “영으로”라고 한다. 원문에는 “행복하다”가 맨 앞에 나온다. 공동번역 문장은 우리 어감에 거슬린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가난할지라도 마음만은 풍족하게 살아야지, 마음조차 찌들면 어쩌나. 5절 기원전 1200~1000년에 이스라엘 백성은 팔레스티나 땅을 점령하여 지파별로 나누어 가졌다. 제3 이사야서에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 상속을 약속하는데, 여기서는 종말 축복을 가리킨다. 쿰란 수사들도 자기네는 선택된 이들의 공동체인만큼 땅을 상속받으리라고 믿었다. 이제 마태 5.5에서는 하느님의 새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이 땅을 상속받으리라 하는데, 여기서 땅은 하늘나라를 가리킨다고 여겨진다. 6절 마태오가 강조하는 “의로움”은 하느님의 뜻을 행함이다. 그러니까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를 갈망하는 이들이다. 7절 하느님은 제사를 바라지 않고 자비를 바라신다, 모름지기 제자들은 하느님의 자비로운 처사를 본받아야 한다. 하찮은 십일조는 지키면서 막중한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저버려서는 안된다, 예수께서는 불쌍한 사람들이 자비를 간청하면 꼭 들어주신다. 또한 돌보는 이 없는 군중을 불쌍히 여기신다. 그리고 불행한 이들을 돌보면 종말 심판 때 구원받는다고 하신다. 8절 구약: “하느님을 뵙는다”,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다”는 것은 하느님이 계시는 성전에 참배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유다교: 의인들의 영혼이 하늘에서 하느님을 뵙는다(에즈라 4서 7,91-98). 그리스도교: 종말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뵙는다. 9절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은 개인적 또는 사회적 차원에서 이해와 화해를 증진하려고 적극 투신하는 사람들이다. 평화의 기도 대로 사는 사람들이다. 구약과 유다교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백성의 대표인 임금, 미래의 메시아 임금, 의인을 하느님의 아들로 여겼다. 이제 평화를 이룩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은 장차 하느님의 아들로 일컬어질 것이라 한다. 원수들을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만큼 평화적이여야만 하느님의 아들로 불릴 것이다. 10절 마태오 시대 박해상을 드러내는 말씀들 참조: “이 도시에서 여러분을 박해하거든 다른 도시로 피하시오, 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인자가 올 때까지 여러분은 이스라엘의 도시들(전도)를 끝내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예언자들과 현자들과 율사들을 보낸다. 너희는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형에 처하며,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도시에서 도시로 (더쫓아다니며) 박해할 것이다”. 12절 12절의 예언자들은 마태오복음 집필 당시 이 교회 저 교회로 다니면서 예언활동을 벌인 그리스도교계 떠돌이 예언자들이다. 이와는 달리 병행문 루카 6.23의 예언자들은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일 것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