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31 화요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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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1-30 | 조회수426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젊은이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요한 보스코 성인의 말이다. 그는 1815년 이탈리아의 토리노 근교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양을 치며 가난하게 살았지만, 어머니의 엄격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라 사제가 되었다. 특히 젊은이들을 사랑하였던 그는 청소년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오다가 1859년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그리스도교 생활을 익히게 하려고 살레시오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1872년에는 살레시오 수녀회도 세웠다. ‘고아들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19세기의 훌륭한 교육자로 꼽히는 그는 1888년에 선종하였고, 1934년에 시성되었다. 제1독서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주해 시련중의 인내 10.36-39에서 예고한 인내와 믿음 가운데, 믿음에 관해서는 먼저 11장에서 길게 언급했고, 이제 12,1-13에서는 시련중에 필요한 인내에 관해 말한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인내로이 달려야 할 길을 달리라고 하면서, 십자가의 고통을 끝가지 견디신 예수님을 모범으로 제시한다. 그런 다음 시련의 의미와 결과를 밝힌다. 시편은 부모이신 하느님이 자녀들의 유익을 위하여 내리시는 교육적 견책이다. 이러한 시련을 존경과 순종의 자세로 잘 참으면 정의와 평화의 열매를 맺는다. 이 항목의 주요 단어는 “인재”, “견책”, “교육” 등이다, 1절 12,1-3은 11장에서 제시한 조상들의 믿음을 독자들에게 적용시키면서 신앙생활을 충실히 할 때에 흔히 겪어야 할 시련을 끈기있게 겪으라고 권한다. 그리고 시련을 훌륭하게 견디어낸 분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어기신 예수를 표본으로 내세운다. 믿음의 길이나 시련중에 인내는 고대 문헌이나 신약성서에서 흔히 운동 시합이나 경주에 비유된다. 바오로는 1고린 9,24-27에서 경기장에서 끝가지 달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을 강조하는 데 비해, 여기서는 모든 장애를 과감히 떨쳐버리고 경기를 인내로이 꾸준히 하라고 한다. 2절 “기쁨 때문에”는 “기쁨 대신에”로 번역할 수도 있는데, 그 경우에는 “기쁨을 포기하고서”의 의미를 가진다. 3절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을 통하여 영광에 이르시어 모든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길을 터놓으셨다. 그런 면에서 그분은 믿는 이들의 선두 주자요 모범이실 뿐 아니라 믿음의 완성자이시다. 따라서 믿는 이들이 시련을 인내로이 극복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과 반대를 기억하고 용기를 얻어야 한다. 4절 박해 때의 순교를 암시하는 것 같다. 특히 인용문인 잠언이 박해받는 사람들에 관한 위로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러한 추측을 낳는다. 복음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24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30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35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주해 야이로의 딸을 되살리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다 21-43절에는 야이로의 딸을 되살리신 소생이적사화 중간에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신 치유이적사화가 끼여 있다. 말하자면 샌드위치처럼 이야기를 엮었다. 신약학계의 통설을 따른다면 두 가지 이적사화는 본디 따로따로 전해오다가 후대에 이르러 지금처럼 연결되었다. 그럼 누가 샌드위치처럼 연결했을까? 복음서 집필 이전의 전승자가 연결했다는 설도 있고 마르코가 복음서를 집필하면서 비로서 연결했다는 설도 있다. 야이로의 딸을 되살리신 소생이적사화는 치유이적사화 서술양식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 즉, 상황묘사, 기적적 소생, 소생 실증, 목격자들의 경탄 순으로 엮인다. 그리고 소생이적사화는 자연이적사화에 속하므로 사건사를 논하기보다는 의미사로 추구해야 한다. 그러면 이 사화의 뜻은 무엇인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마치 잠자는 사람을 깨우듯이 죽은 사람을 되살리실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분이야말로 구약시대에 소생이적을 행한 엘리야 혹은 엘리사보다 훨씬 탁월한 분이시라는 것이다.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신 치유이적사화는 고정 서술양식을 벗어났다는 느낌을 줄 것이다. 그렇게 된 까닭은 부인이 수치스러운 병을 앓은지라 고쳐주십사고 청하기도 어렵거니와 치유된 사실을 드러내보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21절 예수께서 호수 이편 저편으로 왔다갔다하시는 것과 군중이 모여오는 것은 마르코가 앞뒤 문맥을 연결할 때 즐겨 쓰는 소재다, 마르코가 5,1-20과 5,22-43을 연결하면서도 같은 소재를 택했는데 5,1-2.18을 고려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호숫가에 있었다”대신 “그분은 호숫가에 계셨다”라 번역할 수도 있다. 22절 회당장은 회당예배를 주도하고 회당건물을 돌보는 사람이다. 소생이적사화는 본디 22절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24절 “그래서 그분은 그와 함께 떠나가셨다”와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35절)는 본디 직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고 큰 군중이 그분을 따르면서 그분을 밀쳤다”(24ㄴ절)는 마르코가 앞뒤 문맥을 연결하고자 써넣은 것이리라. 26절 의사에 대해서 혹평을 내린다, 유다교에서 의사를 높이 평한 사례도 더러 있으나, 대체로 혹평을 가하여 “가장 훌륭한 의사라도 지옥 가기 알맞다”고 한다. 그 까닭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의사들이 수입에 집착한 나머지 치료비를 터무니없이 많이 받을 뿐 아니라 돈없는 사람을 돌보지 않기 때문이요 또 하나는 의술이란 부녀자들도 상대해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28절 마태 9.20(루카 8.44)에서는 “예수의 옷단에 달린 술을 만졌다”한다, 신령한 사람은 치유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 능력은 접촉을 통해서 옮겨간다고 당시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리고 유다교의 규정에 의하면 하혈하는 부인은 불결하며 그 부인과 접촉하면 불결이 전염된다고 하는데 이 치유이적사화에서는 이 점은 전연 거론하지 않는다. 33절 하느님의 위력이 나타날 때 으레 인간은 공포와 전율에 사로잡히는 법이다. 34절 “딸아”는 애정어린 호칭이다. 2,5의 “아들아” 챀조. 그리고 그리스 치유이적사화를 보면 병자가 지적쟁이들 신뢰한다는 표현이 있으나 “믿음”이란 낱말은 나오지 않는다. 믿음이란 심리적 신뢰를 넘어 하느님의 위력을 드러내시는 예수께 전적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실존적 의탁이다. 이런 “믿음”이야말로 “구원”을 가져온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소”라는 말씀이 5.34;10.52;루카 7.50;8,48; 17.19;18.42에 있다. 그리고 “평안히 가시오”는 직역하면 “평화로 가시오”인데 유다인들의 작별인사법이다. 35절 “그분이 아직 말씀하시고 계실 때에”는 전승자 혹은 마르코가 34절과 35절을 연결하면서 삽입한 것 같다. 35절은 본디 24ㄱ절과 연결되었으리라. 37절 세 사람은 예수께서 가장 아끼신 제자들이다. 38절 초상이 나면 적어도 피리부는 사람 둘, 곡하는 부인 하나를 구해야 한다. 39절 사람이 보면 아이는 죽었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아이가 잠자고 있다. 그분은 하느님의 위력을 지니고 계시므로 아이를 되살리실 수 있다. 40절 엘리야는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방에서, 엘리사는 방에 문을 닫고 소생이적을 행했다. 41절 엘리야와 엘리사는 잡다한 행동을 하고 하느님께 간청하여 비로소 소생이적을 행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고 일어나라고 명하신다. 그러니 예수님은 엘리야나 엘리사보다 훨씬 탁월하시다는 것이다. 예수의 우위성, 이것이 이 소생사화의 참 뜻이다. 탈리다 쿰은 아람어인데 마르코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을 위해서 번역해 놓았다. 42절 42ㄱ,43ㄴ절은 소생 실증이다. 42ㄷ절은 목격자들의 경탄이다. 43절 목격자들에게 내리신 함구령은 메시아 비밀과 어울리는 소재로서 마르코가 덧붙인 것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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