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 목요일 주님 봉헌 축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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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2-01 | 조회수355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제1독서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2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복음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주해 정결례-속량 22ㄱ.24절에서는 정결법을,22ㄴ-23절에서는 속량법을 다룬다. 여기 정결법은 다음과 같다, 남아을 낳은 산부은 40일간, 여아를 낳은 산부는 80일간 불결한 것으로 여겼다. 남아의 산모는 40일, 여아의 산모는 80일이 지난 다음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일년생 어린양 한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를 제물로 바쳐 속죄의 제사를 그려야만 다시 정결하게 되는 것으로 여겼다. 가세가 가난한 때는 제물로 비둘기 한 쌍만 바쳐도 되었다. 이를 빈자의 제물이라 하는데 마리아도 그렇게 했다. 출산으로 말미암아 남편이 부정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요셉은 정결례를 치를 필요가 전연 없었는데도 그도 함께 예루살렘에 가서 그 예를 행했다는 식으로 말한다. 맏아들을 속량할 때 부모나 아기가 성전에 가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그들이 함께 예루살렘에 갔다는 것은 엘가나와 한나가 어린 자식 사무엘을 실로 성전에 바쳤다는 이야기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23절 출애 13.3.12.15. 24절 레위 12.8. 25절 즈가리야와 아리마태아 요셉과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처럼 시므온도 의로웠다고 한다. “의롭고 경건하다”는 다같이 율법을 잘 지킨다는 뜻이다. 위인 탄생에는 흔히 시므온 같은 사람이 나타나 아기의 장래를 예언하는 법, 불교의 원시 경전 숫다니파아타를 보면 석존이 탄생하자 아시타라는 선인이 나타나 아기를 안고 아아가 족에게 이렇게 예언했다 한다, “이 왕자님은 정각의 절정에 이를 것입니다, 이분은 비할 바 없이 훌륭한 청정을 보시고, 많은 사람들이 이익을 도모하고, 불쌍히 생각하는 까닭에 법륜을 돌릴 것입니다. 그의 청정한 뜻과 행동이 널리 퍼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의 제 여명은 길지 않고 중도에 저에게 죽음이 찾아 올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위로받기를”은 직역하면 “이스라엘의 위로를”인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뜻한다. 26절 “주님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아라는 뜻이다. 29절 루카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부르던 노래 세 편을 1,46-55,68-70;2.14에 옮겨실은 바 있다. 이 노래들은 본디 예수님의 구원사건을, 특히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노래 한 것 같은데, 루카는 마치 마리아가 예수 잉태를 노래한 양, 즈가리야가 요한 출생을 노래한 양, 천사들이 예수 탄생을 노래한 양으로 꾸몄다. 이제 29-32절에 또 한편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이 노래의 용어, 문체, 보편적 구원사상은 제2 이사야서와 매우 비슷한다. 이 노래의 출처를 정확히 밝히기란 어렵다. 다만, 예수님의 구원사건을 두고 민족적 자부심을 지닌 교회,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복음을 전한 교회에서 만들어 보른 노래라 하겠다. 아마도 해외 유다인 그리스도교계의 노래였으리라. “주재자”는 그리스어 데스포테스를 번역한 것인데 이는 생사 대권까지 쥔 절대 지배자라는 뜻이다. 29절; 사도 4.24; 묵시 6.10에서는 하느님을, 2베드 2.1; 유다. 4에서는 예수님을 그렇게 부른다. “풀어주다”는 수게 하다, 죽게 하다, 두 가지 뜻이 있다. 해외 유다인 그리스도교계에서 부른 노래에서는 쉬게하다는 뜻이었으리라. 즉,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구원사건을 학수고대하느라 몹시 긴장한 유다인들에게 그 일을 이룩해 주시어 이제 쉬게 하신다는 것이다. 마치 주인이 수직 임무를 마친 종을 쉬게 하듯, 그러나 현재의 문맥에서는 시므온이 자기 심정을 토로한 셈이다. 늘그막에 예수님을 뵈었으니 이제 편히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30절 “당신의 구원”, 곧 하느님의 구원은 해외 유다인 노래에서는 예수님의 구원사건을 읊었으나, 현재의 문맥에서는 예수님 자신을 뜻한다. 31절 이방인들도 구원의 혜택을 입는다는 보편적 구원관이 루카복음에는 여기 313-32절에 처음으로 명백히 나온다. 34절 시므온의 예언은 유다인들 가운데 더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대부분은 배척한 역사적 체험을 참작하여 루카가 창작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 유다인들은 구원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멸망할 것이다. 후자가 전자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배척당하는 표징”이 되셨다. 사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암시하는 상징이셨다. 불행히도 유다인들 절대다수는 연약한 상징만 보았지 상징의 크나큰 뜻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35절 마리아가 혹독한 고통을 겪는 까닭은 이스라엘 백성 대부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여 멸망을 자초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숨은 생각, 곧 믿지 않는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36절 예언자 시므온에 이어 예언녀 안나가 나오는데 루카는 종종 남녀를 차례로 등장시키곤 한다. 37젏 1세기에는 교회에서 공인한 과부단이 있었는데, 루카는 안나의 삶을 그 과부들의 귀감으로 제시한 것 같다. 과부 된 지 여든네 해일 수도 있고 처녀생활, 결혼생활을 과부생활을 다 합쳐 여든네 해일 수도 있다. 38절 직역하면 “예루살렘의 속량을”, “예루살렘의 속량”은 “이스라엘의 위로”(25절)와 같이 메시아의 구원을 뜻한다. 40절 요한의 성장 실태와 병행하여(1.80) 예수님의 성장 실태를 서술한다(40.52절).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나는 선악과인가? 법을 다루는 기관에서 잘잘못을 따져 집행을 하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겉모습은 먹음직스럽게는 생기지 않았으니 선악과는 면한셈이다. 그리고 만약에 결혼을 한다면 반려자도 먹음직스럽게 생기지 않아야 한다. 그러니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그저 바라만 봐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아름다워도 거룩함이 없다면 선악과의 모습은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그런데 예수님 이후에는 이러한 선악과 문제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용서하라시는 예수님. 사랑하라시는 예수님. 이럴진데 하느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 나오게된 우리들은 예수님 오신 이후에는 그분 말씀을 믿는 나도 어찌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겠는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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