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7 연중 제6주간 금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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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2-16 | 조회수356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우리가 내려가서 사람의 말을 뒤섞어 놓자.> 5 그러자 주님께서 내려오시어 8 주님께서는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다. -. 우리가 내려가서 사람의 말을 뒤섞어 놓자. 복음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주해 어떻게 예수를 따라야 하는가? 본디 상관이 없는 네 단절어가 초창기 신도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일찍이 어느 전승자가 넷을 한데 모아 집성문을 엮었는데, 마르코는 그것을 채집하여 이 자리에 배치했다. 모름지기 제자들은 수난하고 죽으신 스승을 따르고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34절 추종어의 변체가 어록에도 전해온다. 추종에 요구되는 두 조건은 자아 부정과 십자가 수락이다. 자아 부정은 무조건 자아를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추종에 역행하는 자아를 버리라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님을 철저히 따름으로써 자아를 온전히 실현하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버리라”고 명하신 것은 장자가 “자아를 잃었다”고 한 것과 같은 뜻이다. “그 십자가를 지고”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일을 상기하여 전승자가 가필한 것 같다. 그렇다면 여기 “그 십자가”는 예수의 십자가일 수도 있고 추종자의 십자가일 수도 있겠다. 35절 이 단절어의 젼체가 어록과 요한 12.25에도 있다. 35절의 경우 전, 후반부가 병행문인데 “나와 복음 때문에”를 삭제한다면 더욱 완벽한 병행문이 된다. 전승자가 “나 때문에”를 덧붙인 데 이어 또한 마르코가 그 사이에 “복음”을 덧붙인 결과 “나의 복음 때문에”라는 표현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가필을 제외한 병행문을 살펴보자. 얼핏 보면 군 지휘관의 훈시를 연상케 한다. 전선으로 촐동한 병사들을 앞에 놓고 “죽을 각오를 하면 사고 살 생각을 하면 죽는다”따위 훈시를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 지휘관이 아니고 하느님 날 선포자였다. 따라서 단절어의 뜻인즉 이렇다. 지금 일시적인 목숨을 보전하려고 작심하는 사람은 장차 신국에서 영생을 잃을 것이요, 현재 일시적인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은 장차 신국에서 영생을 차지할 것이다. 그럼 어떤 상황에서 이 말씀을 하셨을까? 예수 생애 말기쯤 종교계 지도자들이 당신을 처단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스승은 제자들을 상대로 이 역설적인 말씀을 하셨으리라, 36절 36-37절 단절어에는 상업용어가 많이 나온다. 벌어들이다, 손해, 이득, 대가, 돈은 많이 벌어들이고 목숨은 잃어버리는 미련한 것을 경고하신 토막 말씀인데 이와 비슷한 내용의 단절어가 루카 12.15에도 전해온다. “여러분은 온갖 탐욕을 주의하고 조심하시오. 사실 제아무리 부요하다하더라도 사람이 자기 소유로 자기 생명을 보장받지는 못합니다.” 또한 어리석은 부자 예화로써 같은 내용을 생생하게 이야기하셨다. 그리고 아람어로 재물을 마몬이라 하는데, 그 어원을 풀이하면 “실하다. 믿음직스럽다”이지만 실상 마몬은 “부실하다. 믿을 바 못 된다”고도 하셨다. 그러므로 마몬이 아니라 하느님께 의탁해야만 지금의 삶도, 영생도 보장받는다는 뜻으로 예수께서는 여러 단절어와 예화를 말씀하셨다. 38절 지금 예수님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대로 장차 종말에 예수께서도 똑같은 모양으로 대하시겠다는 종말론적 동태보상률이다. 그 변체가 어록에도 전해오는데, 루카의 구절이 가장 오래된 전승이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에 관해 고백하면 인자도 하느님의 천사앞에서 그에 관해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사람은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부인당할 것입니다.” 그럼 누가 왜 이 종말론적 동태보상률을 발설하셨을까? 초창기 신도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밝혀 “예수는 주님이시다”또는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라고 “환성을 질렀다”. 그런데 “나에 관해 고백하다”는 바로 이런 부류의 환성을 뜻한다. 그러므로 여기 종말론적 동태보상률은 예수님 말씀이 아니고 초대교회에서 창작한 말이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왜 이런 보상률을 창작했을까? 박해받는 가운데서도 예수께 대한 믿음을 끝까지 간직하도록 신도들을 격려하려고 그렇게 했다. 8.35; 10.29 참조. 여기 “인자”는 종말심판관. 인자의 아버지는 하느님, 그러므로 인자는 “하느님의 아들”이기도 하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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